[인터뷰] 서도이 작가의 화폭에 옮긴 ‘미투’
2018년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 개인전
2차 가해 발언 모아 ‘합동 장례’ 치러
“아픈 기억 떠나보내고 평안하길”

여성신문은 그간 다양한 젠더폭력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사회가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던, 젠더폭력 피해 ‘이후’의 삶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통념과 편견도 비판적으로 고찰했습니다. 이 기획이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 사회의 성평등 담론 확산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어떤 말들 합동 장례' ⓒ서도이
'어떤 말들에 대한 합동 장례' ⓒ서도이

2018년 2월, ‘미투(#MeToo)’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이라는 오싹한 이름의 전시가 열렸다. ‘민영’은 전시를 연 서도이 작가의 개명 전 이름이다.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첫 개인전 주제로 삼았다. 5개월 뒤에는 ‘죽은 민영이의 49재’ 전을 열었다.

서 작가는 2009년부터 2011년, 2017년 등 세 번의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 집에서 울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다짐,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마음”을 전시로 표현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꼬집고, 실제 피해자의 삶이 어떤지 보여주고 싶어서 연 전시였다.

(사)여성·문화네트워크가 주최하고 문체부가 후원하는 2019년 양성평등문화상 시상식에서 신진여성문화인상을 받았다. 여러 언론과 인터뷰를 했고, 전시를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감독 홍석영, 2019)도 제작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작가는 왜 자신의 장례식을 치렀을까

2017년, 서 작가는 성폭력 피해 경험 후 해바라기센터에서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시기 또 다른 성폭력 사건을 겪게 됐다. “삶이 무너졌”지만, 피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례식을 열기로 했다. “가족들에게 개명을 하고, 스스로를 위한 장례식을 치르고 싶다고 말했어요. 무너지는 대신 말하는 걸 택했죠. 피해자였던 민영이는 죽지 않고도 죽고, 사람들이 전시를 보고 ‘왜 민영이가 죽어야만 했을까’ 생각해보길 바랐어요.”

2018년 2월, 서울 강남구 ‘예술공간 땅속’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와 미투 운동의 확산이 겹친 건 우연에 가까웠지만, 서 작가는 하나의 흐름으로 봤다. “‘나도 당했다’에서 그치지 않고 ‘그래서 이렇게 살았어’까지 표현하고 싶다. (...) 가해자를 처벌하고,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모든 과정이 중요하지만, 그만큼 피해자의 삶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서도이 작가가 가장 애착을 지닌 '26개의 영정' 드로잉 연작. ⓒ서도이
서도이 작가가 가장 애착을 지닌 '26개의 영정' 드로잉 연작. ⓒ서도이

전시의 핵심은 연필 드로잉 연작 ‘26개의 영정’이었다. 서 작가가 가장 애착을 지닌 작품이다. 영정이지만 사람의 얼굴 대신 작가가 기억하는 성폭력 경험을 한 장면씩 그려서 모았다. “26개의 장면 모두 딱히 구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바로 화면에 담을 수 있었을 정도로 저에겐 깊이 각인된 기억이었습니다.”

서 작가는 원래 유화 작업을 주로 했지만 ‘26개의 영정’ 작업은 연필로 그렸다. 작업 도구가 바뀌면서 훨씬 더 오래 화면을 마주해야 했는데, 성폭력 사건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처음엔 개명함으로써, ‘성폭력 피해자’인 민영이를 행정적으로 분리함으로써 버리려고 했어요. 도이가 된 저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거죠. 그런데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민영이의 삶을 되돌아보니, 본질적인 문제는 나의 삶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가 되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가해 발언을 모아 ‘합동 장례’를 치르다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불타지 않앗던' 설치 작품. ⓒ서도이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불타지 않았던 말들' 설치 작품. ⓒ서도이

첫 전시 현장에는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불타지 않았던 말들’이라는 설치 작품도 있었다. 서 작가가 들었던 2차 가해 발언 중 한 문장을 선택해, 모집한 지원자들에게 그 문장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등을 묻고, 2차 가해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지원자가 2차 가해 발언을 천 위에 쓰면 서 작가가 그 선을 따라 수를 놓고 천장에 매달았다. 관람객들은 그 밑에서 향을 피웠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면 공감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사회 문제인 만큼 감상자가 전시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싶었어요.”

작가의 아버지를 비롯해 몇몇은 전시장에 근조화환을 보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실 제 부모님께는 그 전시가 상당히 불편하셨을 텐데, 아버지가 연대해주신 게 큰 힘이 됐어요. 친구도 근조화환을 보내줬는데, 리본에 ‘도이의 탄생을 축하한다’고 적어 준 게 기억에 남아요. 그 말처럼 그 장례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고통이 훌훌 털어지진 않아도 저는 더 강한 사람이 됐습니다.” 

전시 관람객들은 서 작가에게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다고, 성폭력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서로 응원을 전하는 이들도 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책임감과 동시에 큰 원동력이 됐습니다. 제가 더 큰 위로를 받아요. 우리는 연대하고 있어요.”  

성폭력 경험과 기억에는 ‘장례식’이 필요하다

여러 언론에 첫 전시 ‘죽은 민영이의 장례식’이 보도되면서 서 작가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연락을 받았다. “이 전시가 단순히 전시였다기보단 치유를 위한 하나의 의식행위였던 만큼, 다른 분들을 위해 대신 장례를 치러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해 7월, 두 번째로 연 ‘49재’ 전시에선 ‘어떤 말들에 대한 합동장례’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전작 ‘태워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불타지 않았던 말들’을 변주한 작품이다. 다른 피해자들이 들은 2차 가해 발언을 모아 병풍으로 제작했다. 전시장에는 제기용품도 설치했고, 관람객이 향을 피우거나 절을 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 오프닝 날에는 케이터링 대신 제사상을 차렸다. 

수집된 문장 중에는 사건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2차 가해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직접 한 말로 추정되는 문장들도 있었다.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는 말들이었다. “숨이 안 쉬어질 만큼 무겁고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민영이에게 평안이 오기를 기도했어요.”

이어지는 기사 ▶ 성폭력 고백하자 쏟아진 악플...예술로 승화하다 www.womennews.co.kr/news/207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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