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평론가

@b2-1.jpg

박미경 1집. 1994.▶

대중 예술 속의 여성상이 점점 강해지는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나, 최근에는 외향적이고 직설적이며 육체적으로도 강한 여성상이 더욱 떠오르는 듯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툭하면 말보다 발이 먼저 상대방의 무릎으로 날아가는 공효진 이미지의 캐릭터가 인기를 끌더니, 올해의 <다모>, <보디가드>, <때려> 같은 작품에서는 무협과 격투의 한복판에서 육체적 힘을 보여주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다. 그저 끈질기게 참고 견디는 외유내강(外柔內剛)형 현모양처, 혹은 생활 전선으로 밀려나간 또순이형, 혹은 '여성은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같은 말로 대변되는 강한 어머니형 등등, 대중 예술이 강한 여성을 그릴 때 여성만의 독특한 강인함의 형태를 보수적으로 고수했던 것에 견주자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이른바 '남성적'이라고 일컬어지던 성격을 보여주는 여성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까? 대중가요사에서 이런 스타일의 첫 시작은 아마 양희은이겠지만, 가장 가까운 시기를 더듬어 본다면 1990년대 중반 박미경을 꼽아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네가 나를 떠나려 한다면 / 나를 사랑했단 말도 모두 연극처럼 느껴질 뿐이야 / 마음이 변했다면 이유를 대지 마 오예 / 내가 싫어진 걸 난 알고 있어 가식적인 말로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 / 이젠 기대하지 않아 너의 곁엔 다른 얼굴 다른 모습뿐이야 / 다시는 나도 돌아가지 않아 너를 위해 더 이상 난 슬퍼지긴 싫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어 /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나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 / 이젠 내 맘속엔 너의 자린 없어 오예 / 모두 버린 거야 지금까지 내게 남겨진 슬픈 사랑이 모든 기억들 / (후략)

박미경 <이유 같지 않은 이유>

(1994, 김창환 작사, 천성일 작곡)

박미경은 강수지에서 하수빈으로 이어지고 있던 청순가련형 고운 목소리들을 일거에 물리치고, 강렬한 샤우팅과 휘날리는 머리카락 속에 이글이글 타는 듯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그 시기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우리 대중가요사에서, 애인에게 이렇게 분노하며 대드는 여성상은 거의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예전 트로트에서 흔히 보이던 소리 죽여 흑흑거리거나 남자 바짓가랑이를 부여잡는 정서와도 다르고, 손톱 세우며 강짜 부리는 앙탈과도 다르다. 박미경 노래의 주인공은 (흔히 분노한 남자들이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릴 기세이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노래를 지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대중의 정서 흐름을 좇아가는 '스타제조기'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변화는 작가의 과감한 작가의식의 결과라기보다는, 대중의식의 변화를 창작자가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기에 이런 여성상은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탤런트 신은경의 이미지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로 여성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듯했지만 여전히 애교와 앙탈로 남자를 잡는 것에 골몰하는 최진실 이미지와 차별성을 확실히 드러내면서, 호방하고 화끈한 성격의 새로운 인물형을 창출했다. 확실히 신은경과 박미경은 닮은 데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인물형의 인기는 외환위기로 시작된 경제불황으로 몇 년 동안 사그러들었다. 그런데 이제 강한 여성형 인물이 긴 늪을 지나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신은경은 이전보다 훨씬 화끈하게 가위 들고 문신한 채 부활했고, 후배 캐릭터들은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칼 휘두르고 발차기 하고 글러브 낀 주먹을 날리고 입에다 '야, 짜샤'를 달고 다닌다.

그럼 우리는 박미경에서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다. 박미경이 분노한 대상은 여전히 자신을 버린 남자일 뿐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아니다. 그 인물은 강하지만 여전히 남성에게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가요라 더 이상 복잡한 내용을 담을 수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고 그게 바로 주류 대중 예술의 한계이다. 더 이상 연약하고 수동적인 여자로 살고 싶지 않은 여성들의 상승하는 욕구를, 도발적이고 강한 이미지로만 만족시킬 뿐, 연애와 결혼 이외의 새로운 관계와 성찰 속에서 그려내지 못하는 것, 그 보수성 말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