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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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은 가을치고 퍽 따뜻했다. 겨울이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내 친구 몇몇은 겨울이 오는 걸 몹시도 싫어한다. 추워서 몸이 움츠러들기도 하거니와, 활동할 수 있는 낮은 짧고 밤이 길다 보니 기분은 가라앉고, 동네 구멍가게에 파 한 단 사러 나가는 일도 귀찮으리 만치 몸은 무거워진다는 것인데. 어휴, '케리 하눌라 브라운'처럼 알래스카에서 태어난 이들은 11월부터 3월까지 그 긴 겨울을 무얼 하며 버틸까?

오랜 옛날 겨울만 있던 시절,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시절, 바닷가 마을에 '투파'라는 아이가 있었다. 투파는 물고기도 안 잡고 열매도 안 따러 가면서 바닷가에 누워 꿈만 꾸는 게으름뱅이다. 이 쓸모 없는 몽상가는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난다. 놀기만 하던 베짱이는 한겨울에 덜덜 떠는 신세가 됐지만 투파는 그럴 리가 없다. 원래 겨울만 있던 시절, 오랜 옛날 얘기니까(투파는 바닷가에서도 몽상에 빠질 정도로 추위에는 익숙한 아이다. 굶주림에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투파의 꿈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한결 살기 좋아졌고, 투파는 꿈을 꾸고 들려주는 걸 자기의 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꿈꾸기도 사회에 유익한 하나의 일이라는 얘기로군. 이거 구미에 맞는 얘긴데' 생각하다가는 아차 싶다.

이 책의 매력은 '시적인 그림책'이라는 데 있다. 글과 그림이 서로 팽팽히 당겨져 투파의 세계를 보여준다.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전기도 심지어 태양도 없는, 오래 전 북극의 밤의 세계. 땅 위는 고스란히 하늘로 뒤덮인 마을. 그 푸른 밤의 어두움과 마침내 생긴 따스한 햇빛의 느낌, 아마도 에스키모인들에게 신적 존재인 갈까마귀와 투파의 신비하고도 유쾌한 만남을 풀어내는 그림과, 이를 또 한켠에서 나직하게 속삭여주는 글. 다소 어려운 어휘나 글의 분량이 초등학교 저학년이 읽기에 어려울 정도로 제법 많은 편인데, 소리 내서 읽으면 덜거덕거리고 읽는 재미가 떨어진다.

반복되는 어구들이 있는데도 번역할 때 리듬을 살리지 않아 그런 듯. 묵독을 하면 훨씬 낫다. 소리낼 때는 놓치기 쉬운, 혼자 눈 위를 걸어가는 투파의 발자국 소리나, 거대한 갈까마귀의 낮고 조용하고 쉰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그려진다.

그림책 맨 뒷장의 간략하면서도 재미있는 소개에 따르면, 작가 케리 하눌라 브라운은 알래스카에서 나고 자라 이야기를 썼다 한다. 투파처럼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소도 치고 유치원 교사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는데, 아마도 케리는 추위에 굴하지 않는 활동성 몽상가였나 보다. 투파를 통해 알래스카에서부터 들려오는 케리의 목소리. 겨울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밑에 누워, 빨간 담요를 덮고 누워 꿈을 꾸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꿈만 꾸기를….

케리 하눌라 브라운 글/ 린다 새포트 그림/ 서홍관 옮김/ 웅진북스

김은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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