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요즈음처럼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신문과 방송을 모두 끊고 산골짝에 묻혀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잠시도 조용할 틈 없는 이 나라가 아무리 '재미있는 지옥'(살기 좋은북유럽은 '재미 없는 천국'이란다)이고 '다이내믹 코리아'라지만 이제는 그 다이내믹이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용량초과 상태이다. 혹시 독자 여러분은 이렇게 '이 풍진세상'에서 떠나 조용한 곳에 파묻힌다면 누구와 함께 가고 싶은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 김광수 작곡)

~b5-3.jpg

금모래 반짝이는 강변의 조그마한 오두막집, 집 앞으로는 강이 보이고 집 뒷편으로는 갈대들이 서걱이는 곳. 해변이나 벌판처럼 황량하지도 않고, 나즈막한 산을 끼고 작은 강이 흐르는 곳, 그냥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곤두섰던 신경들이 다 가라앉으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곳을 그리워했던 소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소월도 세상 살기가 참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런 곳을 절실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은 세상사에 지친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금모래와 강변이 아름다운 곳,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갈댓잎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곳, 즉 사람 만나 부대끼는 일이 없는 곳, 물질적으로는 초라하고 고생스럽지만 마음만은 편한 곳이다. 80년 전의 소월도 이런 곳에 살고싶어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 결코 자기 곁으로 되돌아올 수 없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영원히 잃어버린 상실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평생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의 북적거리는 즐거움에 동참할 수 없었던 사람, 그의 시는 늘 이런 냄새를 풍긴다. 이런 가사에 얹혀진 곡(김광수 작곡인데, 최근에 <부용산>의 작곡자인 월북한 음악인 안성현의 노래가 바탕이 되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은 소박하고 정갈하며 아련한 느낌을 풍긴다.

그런데 왜 그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하필 엄마와 누나인가? 독자 여러분들은 만약 이런 곳에 산다면 누구와 살고 싶은가? 엄마와 오빠? 아빠와 오빠? 엄마와 언니? 혹은 남편? 애인? 아들과 딸? 아니면 그냥 친구? 선후배? 이런 수많은 사람들 중 소월은 엄마와 누나만을 선택했다.

'엄마'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 인간문명이나 사회현실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엄마는 자신에게 생물학적으로 낳고 젖을 먹여 키운 사람으로, 자신과 엄마 사이에는 사회적 규율·억압이 끼여들 틈이 없고 스트레스도 없다. 어머니는 보챌 때 언제든지 젖을 내주었듯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준다. 그에 비해 아버지나 형은 사회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첫 관문이므로, 그런 존재는 이 작품에서 제거되어 있다. 어머니의 의미가 이러하니, 세상에서 상처 입은 남자들이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것, 아니 세상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어릴 적 '엄마'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 누나는 뭘까? '누나'는 '엄마'의 대용물이다. 여자들이 수십 년을 아이 낳는 일로 보내던 시절, 큰누나는 엄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업어 키웠다. 일제시대 작품에서 누나를 엄마의 대용물로 그리는 예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소월의 시에도 '접동 아우래비 접동'으로 시작하는 시가 있지 않은가. 아홉이나 되는 오랍동생(남동생)을 먹여살리다 죽은 누이가 동생들 걱정에 저승도 못 가고 접동새가 되어 맴돌고 있다는 내용의 시 말이다. 또 황순원의 초기작 <별>에서도, 엄마 얼굴도 모르고 자란 아이가, 엄마의 대용물로서의 누나에 대해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심리를 아주 섬세하고 서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는 철저히 남성적 시각이다. 세상에 지친 남성이 돌아갈 고향, 비문명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여성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자인 나는, 이 노래가 가슴 저리게 좋지만 '엄마야' 대목에서 그럭저럭 넘어가다가 '누나야'에서는 결정적으로 심사가 복잡해진다. 세상에 지친 내가 강변에 들어가 사는데, 하필 남동생 데리고 간다? 내 몸 편하자고 엄마 데려다 밥하고 빨래 시킨다? 그건 '아니올시다'이다. 그런데도 이 노래가 자꾸 입에서 맴도는 걸 보니, 내 심신이 많이 지쳐있기는 한가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