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은 / 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여자들에게 돈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가기 힘들거나, 돈을 벌어도 자기 이름으로 그 돈을 축적하기 힘든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돈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계속 소수자의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른바, 악순환이다.

11년전, 여성문화예술기획을 설립하고 이 땅에 여성주의 문화의 꽃씨를 심었던 이혜경 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처음 여성영화제를 개최하기로 하고 돈을 모으러 다닐 때, 아는 여자들보다는 아는 여자들의 남편이나, 아버지, 오빠를 찾아가 구걸해야 했다.

'계보'나 인맥, 학맥, 혈연의 네트워크가 없는 여성정치인들이 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 정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여성 특유의 깨끗한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비자금이나 보스의 떡값이 아니라 여성들의 깨끗한 돈들이 모여 줘야 하는데, 깨끗한 돈의 원천인 개개의 여자들이 너무 가난한 탓이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는, 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해결난망인 측면이 있다.

이라크 파병과 재신임 국면에서 호주제 폐지를 비롯한 중요한 여성 현안들이 주요 언론의 지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상 관심 밖으로 밀려난 호주제 폐지 문제는, 아마도 내년으로 그 처리가 넘어갈 것이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진보를 표방하든 보수를 표방하든,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이 심하게 편파적이고 왜곡된 보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여성인권의 회복이라는 현안이, 국제외교문제나 정권안정 또는 교체보다 덜 급하고 덜 중요하다고? 남성들이나 그 남성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데 길들여진 다수의 여성 자신조차 그렇게 믿고 싶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무엇 때문에 정치를 하고 무엇 때문에 외교를 하는가? 다, 국가나 사회라는 이름 속에 묶여있는 개개인들의 삶의 질을 위해서 아니던가? 이라크에 가서 대한의 아들들이 다치고 죽는 것이 비극이고, 미국의 눈 밖에 나서 경제적 외교적 손해를 입는 일도 피해야 할 일이지만, 지금도 삶의 모든 현장에서 2등 인간으로 그 인권을 유보 당하고 있는 2천6백만 딸, 아내, 어머니,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권리회복이 급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남성중심으로 돌던 지구가 사실은 여성들에게도 '둥글게 돌아야 한다'는 진실을 여성 스스로를 향해서도 설득하기가 이다지 힘든 까닭은, 남성중심의 언론조직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을 대신할 '눈'과 '귀'와 '입'이 없기 때문이다. 달걀귀신같은 그 여성들의 얼굴에 눈과 귀와 입을 성형해 넣기 위해서는 수술비가 필요하다. 무력하고 '끼리끼리'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여성언론을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가진 언론으로 만드는 수술비 말이다.

15년전 몇몇 여성운동가의 '무데뽀'적 용기에 의해 태어난 여성신문이 그 성과와 한계 속에서 계간지 이프, 우먼타임즈, 언니네를 비롯한 수많은 웹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여성주의 언론의 탄생을 자극하고 부추겼지만, 그들 모두가 세상을 바꿀 만한 주류언론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주간 또는 계간이라는 형태 속에서 매체력을 가질 수 없는 원천적인 한계 속에 놓여 있다. 여성들이 글도 못쓰는 무능한 닭대가리라서? 아니다. 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계간지 이프가 일찌감치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월간화를 목표로 정하고 기금을 모집 중인데 사정이 얼마나 열악하던지, 카드 돌려막기 고수인 나같은 적자인생으로부터도 1백만원을 뜯어갔다.

15주년 좌담에 참석한 자리에서 여성신문도 일간화를 꿈꾸면서 돈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역구 출마를 선언한 이미경 의원의 후원금 모집 지로용지는 지금도 책상 위에서 “어서 돈 내놔!”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통장에서는 달마다 3만원씩 '여세연' 회비가 꼬박꼬박 빠져나간다. 집 한 칸 없이 친정에 얹혀사는 처지에 무지 아깝고 억울하지만, 난 늘 내 앞에 내밀어진 여자들의 손앞에서 미안하고 죄스러워진다. 아직까지는, 돈을 요구하는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가 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내 딸들에게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돈많은 재벌집 여성들이 뭉칫돈을 턱턱 내놓는 것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여성들이라도 십시일반해야 한다.

앞으로 여성들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대의 앞에서라면, 국가의 경제위기 앞에서 장롱 속 금가락지 내놓는 참여정신으로, 퐁퐁 묻은 백원짜리 천원짜리라도 “이것밖에 없는데 어쩌죠?”라는 태도로 내놔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달걀귀신 신세를 면하는 길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