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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위험은 불균등하게 분포되며, 소수자와 취약 계층에게 가장 먼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감히, 어떻게 자기돌봄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회적 부정의와 제도적 공백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이어나가기를 선택했기에, 나는 투쟁과 연대의 한 양식으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제안하고자 한다.  ⓒPixabay

 

전 지구적 재난과 사회적 위기의 시기에 자기돌봄이 가능한가? 나의 공동체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렵고, 생존 기반이 무너지며, 각자도생의 논리가 우리의 관계를 지배할 때, 우리는 어떻게 지속가능한 삶을 소망하며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까? 근미래가 불확실하고, 안정적인 주거의 기반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는 ‘함께 사는 사회’를 꿈꿀 수 있을까?

결코 평등하지 않은 재난 위험 
함께 살기 위한 ‘급진적 자기돌봄’

지쳐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안타깝지만 숫자로도 선명하게 확인된다. 2020년 12월의 끝자락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쉬었음”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235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쉬었음” 인구는 실업 인구와는 별도로 집계되는데, 경제활동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사유없이 일하지 않는 이들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이 집단은 60대 이상 고령층에서 나타나지만, 2020년에는 전 세대에서 쉬었음 인구가 증가했고, 특히 20대와 30대의 쉬었음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활발하게 사회 진출을 해야 할 젊은 세대마저 일할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장기화된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취약한 단면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택배 노동자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해 길에서 쓰러지고, 복지 제도의 사각지대 속에서 빈곤 인구가 방치되거나 고독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요양 시설, 장애인 거주시설, 그리고 교정 시설에서 집단 감염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재난의 위험은 불균등하게 분포되며, 소수자와 취약 계층에게 이 위험은 가장 먼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감히, 어떻게 자기돌봄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회적 부정의와 제도적 공백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이어나가기를 선택했기에, 나는 투쟁과 연대의 한 양식으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제안하고자 한다.  

구조적 폭력으로 인한 상처 직시하고
적극 치유 위해 일상 재조직하는 것

첫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이 일찍이 말했듯, 우리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는 정치적 투쟁의 행위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단순히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족의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부조리의 문제를 개인적 수련과 도덕성의 문제로 치환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로운 마음”과 “건전한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과 부정의로 인한 상처를 직시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도록 일상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회복을 위한 시공간을 확보하고, 온전히 나의 삶과 생명을 회복시키는 실천적 의례가 무엇인지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나를 살리는 행위를 습관화하자. 나의 동료들에게 급진적 자기돌봄의 방안을 적극적으로 묻고, 가능한 실천을 함께 모색하고 공유하자.

둘째, 연대와 상호부조를 통해 급진적 자기돌봄을 확대할 수 있는 심리적,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연대를 핵심 원리로 삼는다. 자기돌봄을 실천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급진적 자기돌봄의 목표가 신자유주의적 생존이 아니라 “나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 자신과의 연대, 소수자와의 연대, 상처 입은 자들과의 연대, 그리고 곁에 있는 나의 공동체와의 연대를 통해 급진적 자기돌봄을 서로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내가 힘들 때 나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떠올려보자. 가족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 수도 있고, 혹은 먼 친구이지만 서로를 신뢰하거나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들과 주기적으로 연락하며 힘들 때 서로 돕기로 약속하는 돌봄 네트워크를 만들자. 이들은 내가 자기돌봄에 집중해야 할 때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혹은 자기돌봄의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할 때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의지하고, 또한 그들 역시 내게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알리자.

모두의 생명 구하는 급진적 자기돌봄
연대와 공동체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하다

셋째, 급진적 자기돌봄은 무조건적인 긍정을 강요하지 않으며 (즉, “긍정적 마음가짐”을 유지하라는 뜻이 아니며),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힘든 과정에 섣불리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거야.”), 고통스러운 순간을 억지로 긍정적으로 포장하는 것(“그래도 이런 좋은 면도 있었어.”)은 매우 제한적인, 그리고 때때로 해로운 형태의 자기돌봄이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나의 고통이 사회적 부조리 및 폭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스스로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일터에서 번아웃(burnout)을 경험할 때 적극적으로 회복의 시공간을 확보하고, 언론을 통해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소식을 접할 때 그런 소식이 나의 감정과 일상을 잠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이다. 나의 기분을 즉각적으로 좋게 만들거나 재충전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도 좋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사회 문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진적 자기돌봄의 목표다.

모두가 바쁘게 달리는 한국 사회에서 자기돌봄의 중요성은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왔다. 우리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큰 진전인지도 모른다. 재난, 위기, 그리고 구조적 폭력과 사회의 실패를 지속적으로 목도하는 환경에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삶을 재구성하고 급진적 자기돌봄의 양식을 발명해내야 한다. 언젠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발표를 하던 도중 지나가듯 말했다. “우리의 내면을 향하는 분노”와 “바깥 세상을 향하는 폭력”의 에너지를 자기돌봄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그가 가끔씩 툭 던지는 여러 멋진 말들 중의 하나였겠지만, 나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를 놓고 몇 달을 씨름했다. 신자유주의적 자기 보전이 아닌, 휘발성 쾌락의 범주를 넘어서는, 그리고 모두의 생명을 구하는 급진적 자기돌봄은 결국 연대와 공동체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강제되는 논리를 거부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자기돌봄을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는 2021년이 되었으면 한다.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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