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마음이 또는 생각이 내킬 때마다 편하게 쓰는 홈페이지 칼럼에 '향숙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잘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진 이후로 영화는 초히트를 기록했고 그 결과로 영화 속 살인 용의자 중 한 명인 백강호라는 남자의 캐릭터가 일파만파 복사되고 있는 중이었다. 글의 내용은 약간 지능이 모자란 데다 얼굴에 화상까지 입어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이 남자가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내뱉는 '향숙이? 이쁘지… 향숙이 이뻤다'라는 대사가 인기를 끌면서 결국은 다시 개그의 재료로 사용돼 사람들의 웃음을 이끌어내고 있는 상황이 내심 못마땅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야기도 아니고 <살인의 추억>은 화성여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 것이고 향숙이는 열 명 넘게 죽어 사라져 간 여성 중 한 명의 이름이었으므로.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살인자는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고 빗속에서 강간살해당한 여성의 이름이 코미디 프로에서 자꾸 불려지는 것이 그 글을 쓰던 때까지도 끝내 맘속에서 용납되지도 용서되지도 않았는데, 글을 쓰던 당시에는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였다. 며칠 후에 답글이 하나 달렸는데, “향숙이는 실제 존재한 여자의 이름이 아니고, 다만 영화 속에 나오는 이름이니 그다지 괘념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내가 걱정한 것은 분명 거기 화성에는 향숙이란 여자가 살고 있었고, 죽어갔고,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아픈 상처를 헤집어 놓는 것은, 심지어 이름을 불러대며 웃어젖히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긴 했다. 그러나 답글에서처럼 향숙이라는 이름이 영화 속 이름일 뿐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해도 내 마음은 마찬가지다. 잠깐만 상상을 해보라. 한 여자가 일을 마치고(산보를 나왔던) 조용한 시골 마을의 어두운 길을, 비가 오는 그 길을 걸어가다가 무작위로 범행대상으로 지목된다. 그리곤 자신의 브래지어 끈으로 입이 막히고 스타킹 끈으로 목이 졸린 채 살해당해 내팽겨쳐진다.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장면을 며칠 전에 비디오로 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들은 모두 허옇게 눈을 뜬 채 빗 속 진창에 두 손이 묶인 채 발가벗겨져 죽어 있었다. 영화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도록 잘 만들어진 것은 인정한다. 나는 지금 영화를 비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감독의 시선의 올바름을, 연기자의 연기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살인에, 죽음에, 성폭력에 무감각하고 잔인하면 저렇게 죽어간 여자의 이름을 코미디로 불러내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가에 있다. 재밌게 보던 개그프로를 난 그 이후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 코너 하나덕분에 정이 떨어진 게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개그프로보다 더한 것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보고야말았다. 그것도 '향숙이'가 웃음꺼리였다.

늦은 밤이다. 슈퍼모델 선발대회 전야제가 열렸다. 미스코리아대회가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공중파에서 방영을 포기하고 난 후에도 어쩌면 더욱 선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슈퍼모델 선발대회는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공중파로 방영되고 있었던 것.

우리 집 큰 딸이 그놈의 전야제를 학수고대하고 있기에, 아니, 여성의식이 그래도 좀 있다는 아이가, 심지어 미인선발대회 저지를 위해 몸소 온갖 투쟁을 해 온 엄마 앞에서 왜 저모양인가 싶어 물었다. 대답인즉슨 그 전야제에 아이가 좋아하는 남자 가수 세 명이 동시에 출연한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눈을 주고 있었다.

여자들은 그 훤칠한 키와 개성 있는(?)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드러내고 수영복 차림으로 남자 게스트들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합숙 훈련에서의 에피소드를 풀어내며 웃어대고 있었다. 늘 하듯이 남자 게스트들은 미녀들을 앞에 있어 눈 둘 곳이 없다느니, 정신을 못 차리겠느니 하면서 헤벌쭉 하고 있었다.

이어진 장기자랑 시간. 조를 짜서 여자들이 장기를 뽐내는데...

세 명의 여성이 앞으로 나왔다. 뭘 하실 건가요? 향숙이 비트박스요. 한 명은 입으로 비트를 넣고, 한 명은 옆에서 이뻤다 이뻤다를 연발하고... 한 명은 향숙이 향숙이 불러대고...

수영복을 입고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나온 여자들이 제 나이 또래에 강간살해당한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장기자랑을 한다!?

알고나 하는 걸까? 나는 하도 어이없어 혀를 차고 말았으나 진퇴유곡에 빠진 심정이었다. 별 생각 없이 향숙이 비트박스로 장기 자랑하는 여자들을 욕할 수도 없었고, 그걸 보고 박수를 치는 진행자를 욕할 수도 없었고, 대본 중에 그것을 걸러내지 못한 작가도, 프로듀서도 욕할 수 없었다. 다만, 가슴에 손 얹을 수밖에. 때 없이 성폭행 당하고, 죽어가고, 잘 만든 영화에 호명되어져 잊혀진 이름을 환기시킨 뒤 두번 세번 죽임을 당하는 여자들을 위해. 이 무감하고 선정적이고 잔인한 세상 앞에.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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