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 체스 세계 챔피언
베라 맨치크의 삶과 업적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속 천재 여성 ’베스 하먼‘처럼 당시 체스 챔피언으로 우뚝 선 여성이 있다. 세계 최초 여성 체스 챔피언, 베라 맨치크(Vera Menchik)다. ⓒNetflix, Wikipedia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 속 천재 여성 ’베스 하먼‘처럼 당시 체스 챔피언으로 우뚝 선 여성이 있다. 세계 최초 여성 체스 챔피언, 베라 맨치크(Vera Menchik)다. ⓒNetflix, Wikipedia

요즘 넷플릭스에서 가장 인기 많은 드라마 중 하나인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 1950~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내며 건물 관리인에게 체스를 배워 세계 챔피언으로 거듭나는 천재 여성 ’베스 하먼‘의 이야기다. 

드라마 속 하먼처럼 1920~30년대 체스 챔피언으로 우뚝 선 여성이 있다. 세계 최초 여성 체스 챔피언, 베라 맨치크(Vera Menchik, 1906-1944))다.

첫 여성 체스 세계 챔피언 

맨치크는 세계 최초 여성 체스 챔피언이자 17년 간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해 최장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2011년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여성으로는 최초다.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독점하다시피 한 체스 세계에 야심찬 도전장을 내민 인물이었다.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베라 맨치크. 총 34명 중 여성은 베라 포함 총 10명이다. ⓒWikipedia

혁명으로 바뀐 삶...체스에서 위안 찾다

맨치크는 190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미국 켄터키주 출신인 하먼의 불우한 유년 시절과 달리, 맨치크의 집안은 부유했다. 그러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맨치크 집안의 방앗간은 몰수됐다. 다른 이들과 집을 공유해야 했고, 그마저도 빼앗겼다. 

어린 맨치크는 전학을 가야 했다. 1943년 ‘체스 매거진’에 보낸 맨치크의 편지에 따르면 가혹한 시절이었다. “1919년에서 1920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내가 다녔던 학교엔 물이나 난방, 전기가 자주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학생들은 양초나 석유램프에 간신히 의존해야 했고, 눈보라를 뚫고 한 시간씩 걸어 등교해야 했습니다. 근로 시간 이외에는 모든 대중교통이 멈췄기 때문이죠.” 

맨치크에게 유일한 위안이 된 것은 9살 때 아버지에게 배운 체스였다. 혁명 후 부모는 이혼했고, 체코인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영국인 어머니는 맨치크와 여동생 올가를 데리고 영국으로 이주했다. 

무수한 남성 이기고 세계 챔피언에 오르다

영어를 몰랐던 맨치크는 더욱 체스에 몰두했다. 그가 살던 헤이스팅스(Hastings) 지역 체스클럽에 가입하고, 레슨도 받았다. 외국어로 소통하는 게 힘겨웠던 그에게 체스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체스 매거진’에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체스에 진지하게 임한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침묵과 흡연이 젊은 여성에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사실이죠! 저도 다르게 살았더라면 이렇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체스는 고요한 게임이며 언어를 적절히 구사할 수 없는 사람에겐 최고의 취미입니다.” 

체스를 두는 베라 맨치크
체스를 두는 베라 맨치크 ⓒWikipedia

맨치크는 동네 경기에서 시작해 지역에서, 전국에서, 이후에는 세계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1927년, 최초의 세계 여성 체스 챔피언십 대회에서 우승했다. 여성 경기에서 쉽게 승리를 거둔 이후 남성 경기로 눈을 돌렸다. 그는 여성 최초로 남성 토너먼트 대회에 참가했고, 남성들도 거뜬히 이겼다.

1929년, 맨치크는 23세의 나이에 폴란드의 ‘그랜드 마스터’인 아키바 루벤스타인(Akiba Rubenstein)과의 게임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유명한 남성 체스 챔피언들은 여전히 그를 무시했다. 

그해 말, 맨치크는 체스 매거진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최고 선수이던 앨버트 베커(Albert Becker)는 맨치크와 대결하기 전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여러분,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베커는 경기 전 몇몇 동료들에게 말했다. “맨치크의 이름을 딴 클럽을 결성합시다. 맨치크에게 지는 사람들이 클럽의 정회원이 되는 겁니다. 무승부로 경기를 마친 사람들은 회원 후보 자격만 얻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 베커는 그 클럽의 첫 번째 회원이 됐다. 

전 세계 언론이 맨치크의 경기를 다뤘다. 맨치크는 36개 이상의 남성 토너먼트에 참여했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차례로 이겼다. 러시아의 엘리트층은 맨치크를 고까워했지만, 그는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체스닷컴(Chess.com)은 “오늘날 거의 잊힌 여성”을 기리는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맨치크는 당대 최고의 남성 선수들을 이긴,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냈다.”  

1929년 체코 칼스바드(Carlsbad)에서 열린 체스 토너먼트에 참여한 세계 체스 챔피언들. 앞줄 왼쪽 끝자리에 유일한 여성인 베라 맨치크가 앉아있다.
1929년 체코 칼스바드(Carlsbad)에서 열린 체스 토너먼트에 참여한 세계 체스 챔피언들.
앞줄 왼쪽 끝자리에 유일한 여성 챔피언 베라 맨치크가 앉아있다. ⓒ온라인 영상 캡처

 

제2차 세계대전과 비극적인 죽음

맨치크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다. 1937년, 그는 또 다른 영국 체스 선수였던 루퍼스 헨리 스트리트필드 스티븐슨(Rufus Henry Streatfeild Stevensen)과 결혼했다. 스티븐슨의 건강이 좋지 않아 맨치크는 남편을 간호하고 돌보는 데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스티븐슨은 결혼 생활 6년 만인 1943년 세상을 떠났다. 

1년 뒤, 맨치크는 토너먼트 대회에 출전 중이었다. 세 경기를 연승해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었다. 다음 경기는 6월 27일로 예정돼 있었다. 비극은 경기 하루 전날 일어났다. 1944년 6월 26일, 맨치크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던 런던에 나치 공습이 있었다. 로켓이 그들의 집을 강타했다. 세 모녀는 즉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홍보 웹사이트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 위치한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홍보 웹사이트

오늘날 여성 체스 올림피아드 대회 우승국은 ‘베라 맨치크 컵’을 받는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발행한 여성 세계 체스 챔피언 기념우표의 첫 줄에도 맨치크가 자리한다. 성차별을 딛고 남성들을 호쾌히 무찌른 체스계 ‘철의 여인’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드라마 ‘퀸스 갬빗’의 감동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