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보육시설 강제력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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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니어린이집'은 하나은행, 대교, 한국IBM 등 3사가 공동으로 설립한 직장보육시설 1호다. 8일 어린이집 교사와 함께 있는 어린이. <사진·민원기 기자>▶

노동계 “여성 300인에서 남녀 150인으로 기준 낮춰야”

하나은행·대교·한국IBM 공동 어린이집 1호 열어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고 건강이 나빠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아이를 키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창 일에 재미를 느낄 때인 직장생활 7년차 이모씨(32)는 현재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선배들을 보면서 '나는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혼자 이를 앙다물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이내 알아차렸다. 젖을 막 뗀 아이를 맡아줄 데가 마땅치 않은 사회에선 말이다.

현행 영유아보육법에는 '상시 여성 근로자 300인 이상의 사업장은 직장보육시설을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노동부에 따르면 직장보육시설 설치 의무 사업장 281곳 가운데 보육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은 47곳(16.7%)뿐이다. 설치 의무는 없지만 직장보육시설을 설치한 사업장은 71곳이다.

직장보육시설 설치 의무사업장 가운데 어린이집을 설치한 47곳 중 22곳은 서울대병원 등 의료기관이다. 일반업체와 공공기관의 보육시설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여성 수혜자는 극히 일부인 것이다.

여성부 김애령 정책담당관은 “영·유아 보육법 시행령에서 직장보육시설 설치 의무 대상을 정하고 있지만 이를 어겨도 벌을 받지 않는다”며 “의무조항으로 강제해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나설지조차 미지수인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한창 일할 나이의 고급 여성인력들이 육아문제로 일을 그만두는 비율이 여전히 선진국보다 월등히 높다. 지난달 한국노총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80% 이상이 자녀 보육문제로 직장을 그만둘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한국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25∼34세에서 떨어졌다가 35세를 넘기면 다시 늘어나는 'M자 곡선'을 그린다. 수입이 높은 편인 전문직 여성인력에서도 M자 곡선은 여지없이 나타난다.

미국, 캐나다, 독일,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서는 취업률에 있어 여성들의 연령에 따른 변화는 그다지 크지 않아 정년퇴직 때까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보육정책이 얼마나 후진적인지 알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젊고 유능한 여성인력이 한창 일할 나이에 빠져나가는 건 그만큼 국가 경쟁력을 낮추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육아문제 해결이 시급한 것도 단지 여성 개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기업이나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노동계는 현행 영유아보육법이 현실과 맞지 않으므로 여성 근로자 300인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사무국장은 “여성 근로자 300인 이상의 기업만 어린이집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은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가 많은 현실에 비춰보면 지나치게 현실성이 결여된다”며 “현실적인 대안으로 상시 남녀 근로자 150인 이상 기업의 경우 보육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아 지원은 '비용 아닌 투자'

인식 전환 절실

그는 “노동부에서 최근 기업들이 육아 자문위원이나 정보 센터를 설치할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다”며 “어린이집을 수적으로 확충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야간·24시간·휴일 보육, 영아 및 장애아 보육 등 보육 서비스를 다양화하는 것도 같이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광석 노동부 평등정책과 과장은 “노동부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고용안정 차원에서 보육시설을 지원하고 있다”며 “시설 설치비용은 근로복지공단에 위탁하고 운영비는 고용안정센터에서 지급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영유아보육법에 따라 보건복지부에서 관장한다”고 설명했다.

김애령 여성부 정책담당관은 “기업의 보육시설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자체 해결이 안 되는 기업들이 공동투자하는 방안도 적극 마련돼야 한다”며 “영·유아 보육 업무가 한 부처에서 일괄적으로 시행되도록 하는 것도 과제”라고 말했다. 정책 담당 부서나 여성노동계의 공통적인 지적은 돈보다 기업들의 '인식 전환'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좋은 인력을 갖기 위한 투자로 인식하는 것이 해결의 첫 걸음이라는 말이다.

나신아령 기자arshi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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