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마크] 김지은 『김지은입니다』 (봄알람)

이 책을 언급하지 않고 올해를 지나보낼 순 없다. 올해 3월 출간돼 수많은 여성의 연대를 이끈 2020년 대표 도서이자, 최근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가장 많은 독자 투표(51만 2071표)를 받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책이기도 하다. 

『김지은입니다』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비서였던 김지은 씨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 생존자로서 남긴 기록이다. 2018년 3월 5일, 자신의 상사이자 당시 촉망받는 대권 후보이던 안희정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2019년 9월 9일 대법원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까지의 기록이 이 책에 빼곡히 담겨 있다. 

꽤나 두껍고 무거운 책이다. 자신이 겪은 폭력과 범죄를, 그 범죄를 둘러싼 모든 정황과 말들과 시선들을 감내하던 그 당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대화며 문자 메시지며 법정 진술서며 일기며 기고문이며 모든 층위의 기록을 뒤지고, 재발견하며, 다시금 ‘겪어내며’ 쓴 책이기 때문이다. 

​쓰는 이(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쓰기의 내용이 어떠하든 ‘(다시) 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글 속에서 숱하게 발견되는 타자화와 대상화가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상상한 것이든 실제 발생한 일이든 그 사건/장면 안으로 들어가 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작가는 어떠한 사건과 시간의 목격자라는 말이 있기도 하다. ‘그것’을 겪어내며 동시에 ‘그것’을 글로 쓸 수는 없기에, 체험자가 아니라 목격자라는 의미다. 특히나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이 폭력이고 범죄일 때, 자꾸만 내 몫의 책임도 있지 않을지 스스로를 책망하고 괴로워하게 될 때, ‘그것’을 다시 살아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김씨는 이 책을 통해 바로 그것을 해냈다.

​어떻게, 이렇게, 썼을까. 그 결의와 용기를 감히 손쉽게 결의와 용기라고도 부를 수 없어, 독자는 그 힘에 압도된 채 이 책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게 된다.

​지금까지 그 어떤 뉴스를 통해서도 제대로, 혹은 충분히 듣지 못했다고 느낀 김씨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반드시 들어야 할 목소리였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감회일 테다. 사건의 총화가 책 한 권 안에 담겨 있었기에 단편적으로 기사를 소비하는 일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읽기가 가능하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잘 써낼 수 있는 피해 생존자는 몇 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옅은 슬픔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

피해 생존자가 피해 사실 고발을 한 이후에 어떤 시간을,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매체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정치인의 수행비서는 임면권자가 직위를 잃는 즉시 계약이 파기되는 조건의 ‘직업’이라는 것, 김씨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이튿날부터 성폭력 상담소에서 운영하는 피해자 보호 시설에 들어가야 했다는 것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고, 폐쇄적인 조직 내부 동료들에게서는 모순적인 시선과 무수한 뒷소문, 즉 2차 가해를 받을 것이 뻔했고, 일터에서도 쫓겨났으니 그가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피해 사실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행위는 매우 짧은 찰나이며, 그 짧은 시간으로 인해 피해 생존자는 대중 앞에 서서 모든 포화를 감당해야 한다. 그 단편적인 순간과 모든 편견, 모든 비난의 앞뒤로 벌어지는 피해자의 시간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 시간이야말로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는 시간, 제3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간이기 때문이다. 고발에 연대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피해 당사자의 고통과 고독은 제3자들이 다가서기 어려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더 많은 ‘우리’가 모종의 죄책감을 덜어내고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분노하고, 분노 이후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분들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또한 이렇게 책을 펴낸 김씨에게 무한한 감사와 응원을 전한다. 여전히 희망이, 너무 오염되었으나 여전히 희망이 있을 수 있음을 이 책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더 이상, 그럼에도, 분노에 소진되지 않기를, 수많은 여성들에게 간절히 말해주고 싶다. 그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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