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비긴스

 

‘배트맨 비긴스’ 같은 히어로물 시리즈의 서막 같은 제목이 독특하다. 『페미니스트 비긴스』는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라고 일컬어지는 2010년대 중반 이전부터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살아온 여성 7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판이 시끄러워지기 전부터, 페미니스트로 호명하는 일에 더 많은 검열이 필요했던 시기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균열을 내온 이들에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여성 이슈에 관해 다루는 시간적 범위는 지난 30여 년을 아우른다. 책에 담긴 페미니스트들의 연령대도 60대부터 20대까지 다양하고, 어떤 의제에 대해서는 입장도 다를 수 있다. 다만 이들의 공통점은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든 성차별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몸으로 부딪쳐 연대와 투쟁을 실천해왔다는 점이다. 

잡지 《이프》를 창간한 기자이자 60대 페미니스트 유숙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이효린 활동가, 대학 내 총여학생회를 시작으로 대전 지역 여성단체 활동가로 반성매매 운동을 해온 영페미니스트 박이경수, 대학입시를 거부하고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양지혜, 청년 국회의원을 거쳐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로 일하는 장하나, 페미니스트 정치인으로 호명되며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고은영, 뿌리 깊은 가족신화를 해체하는 글을 쓴 저자이자 고위직 여성 공무원 조주은. 페미니스트이자 생애사 작가인 이은하가 진행하고 엮은 7인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다시금 체험할 수 있다. 이름과 직업 앞에 ‘페미니스트’가 붙는 이들의 생애를 통해 넓고 다양한 의제들과 고민들, 또 무엇보다 앞선 이들이 닦아둔 페미니즘의 생생한 역사를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은하/오월의봄/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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