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디자인 

유명한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을 꼽으라면 머릿속엔 남성들의 이름이 떠오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은 건축과 디자인을 빛낸 선구적인 여성들, 그러나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여성들에게 당당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디자인 역사 연구자이자 작가, 큐레이터인 리비 셀러스는 20세기부터 현재까지 디자인사에 한 획을 그은 여성 25명의 삶과 업적을 조명함으로써 온전한 디자인사의 회복을 시도한다. 더불어 역사적, 제도적으로 여성이 소외돼 온 디자인 산업계가 현재까지도 존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커다란 판형에 시원한 이미지들이 펼쳐지며 눈을 즐겁게 하는 이 책 속에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건축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자하 하디드, 브래드 피트와의 스캔들로 구설에 오른 네리 옥스만 등 여성 디자이너로서 직면해야 했던 젠더의 벽을 각자의 방식으로 돌파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커다란 판형 위 시원한 이미지들과 함께 펼쳐진다. 

리비 셀러스/신소희 옮김/민음사/2만6000원

 

 

엄마, 히말라야는 왜 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과 그 앞에 선 한 여성의 뒷모습이 담긴 책 표지는 자칫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한 ‘엄마’의 여행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백운희는 전(前) ‘정치하는 엄마들’ 대표이자, 화제가 된 책 『정치하는 엄마가 이긴다(생각의힘, 2018)』와 『나는 이렇게 불리는 것이 불편합니다(한겨레출판, 2018)』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양육자이자 경력단절여성으로서, 백운희는 그동안 ‘엄마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대변해온 인물이었다. 여성으로서의 약자성을 인식해오던 그에게 기혼 유자녀 정체성이 더해지면서 자기검열과 자기혐오는 더욱 깊어졌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엄마로 사는 일은 비정했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엄마 정체성과 내면의 불안을 잠시나마 떨쳐내기 위해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 간절한 여행길에서 그는 경력단절여성으로서 자신의 소수자성과 대면했다. 그리고 ‘정치하는엄마들’ 활동을 통해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되던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전환하고, 착취와 차별, 혐오를 넘어선 사회를 위한 연대를 제안하게 된다. 2020 출판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백운희/책구름/1만5000원

 

 

사랑의 중력

 

스웨덴 현대문학 최고의 소설가라고 불리는 사라 스트리츠베리의 장편소설이다. 한국 독자들에게 북유럽의 작가들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 책이 담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하다. 고독과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대표작인 『사랑의 중력』은 북유럽 최대 규모 정신병원이었던 베콤베리아의 연대기를 그려내는데, 병원 내 인물들을 통해 북유럽 복지정책의 이면을 비춘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유약한 인간의 고독과 불행, 그럼에도 그 존재들을 따스하고 아름답게 보듬는 작가의 시선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가망 없는 ‘불구자’라고 낙인찍히는 이들, 불안과 우울로 점철된 가족의 삶 등이 담담하게 제시되며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반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스트리츠베리는 유럽 문단에서는 매우 유명한 작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의 최연소 종신회원이자 10번째 여성 회원으로 2016년 선정됐다. 근원적 고독과 공포, 깊은 슬픔 앞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존엄한 사랑의 ‘중력’을 느낄 수 있다.

사라 스트리츠베리/박현주 옮김/문학동네/1만5500원

 

 

래디컬 핼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일상과 사회 시스템의 많은 부분이 무너졌다. 판데믹 사태가 우리에게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함을 일깨워줬다고 할 때, 복지에 있어서는 어떠한 대안이 가능할까? 이 책은 관료적 복지국가에 대한 실망으로 대안을 찾고 있던 사회 활동가이자 사회기업가인 힐러리 코텀이 직접 발로 뛰며 동료 및 지역사회와 실험한 혁신적인 결과물이다. 사람들을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수혜자로 만드는 한편 칸막이 행정과 사각지대로 애를 먹는 관리 중심 사회복지 체제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겪고 있는 사회복지제도의 문제다. 이에 대한 힐러리 코텀의 해결책은 개인과 지역사회로 권한을 옮겨와 ‘관계’와 ‘연결/협업’ 중심의 지역사회 돌봄과 복지체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코텀과 동료들은 5가지 실험, 즉 가족의 삶, 성장과 인생의 전환기, 좋은 일(직업), 건강하게 살기, 잘 늙어가기를 십여 년에 걸쳐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해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래디컬’ 청사진을 제시한다. ‘복지국가에서 진정한 복지는 어떻게 시민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품고 대안을 꿈꾸던 이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책이다.

힐러리 코텀/박경현, 이태인 옮김/착한책가게/2만원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삶이 구차하고 남루할수록 농담은 힘이 세다고 믿는다.” 저자 김현진의 소개에 적힌 문장이다. 가난과 구타를 비롯한 가정폭력, 심각한 자해, 불면, 우울증 등의 내력을 딛고 살아온 저자의 삶이 페이지 가득 펼쳐지지만, 놀랍게도 그 너머에는 폭소를 자아내는 유머가 자리한다. 어떻게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이토록 유쾌할 수 있을까, 묻게 되지만 이 또한 우울증 환자에 대한 편견임을 깨닫게 된다. 세계보건기구가 추산한 2016년 한국의 우울증 환자는 214만 명이 넘기에, 우리 곁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우울증에 가까이 있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아직도 우울증을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우울증에 대한 다양한 말하기는 더욱 많이 필요하다. 김현진은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유쾌하고 코믹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비참한 환경이나 상태를 블랙코미디로 승화해낸다. 다정한 사람들에 관한 일화나 용기 있는 자기 인식의 순간들 역시 진솔하게 적혀 있다.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사업의 문학 1등작으로 꼽히기도 한, 기꺼이 많은 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다. 

김현진/프시케의숲/1만3000원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는 작가이자 예술가, 그리고 장애운동가이자 동물운동가다. 장애운동과 동물운동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저자는 장애인과 동물들 모두 ‘오랫동안 짐짝 취급된 존재들’로 억압돼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선천성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로서,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이 함께 이루어지는 세계를 꿈꾸며 이 책을 썼다. 비장애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출발하지만, 동시에 테일러의 사유는 그 비판의 ‘인간 편향성’을 넘어선다. ‘자립’ ‘생산성’ ‘효율성’ ‘정상성’ ‘자연스러움’ 등의 의미를 규정하는 비장애중심주의가 지구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몸 이야기에서 시작해 비인간 동물들이 겪는 억압과 폭력으로 확장되는 논의는 여러 페미니스트 작가들과 장애학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지금까지 현실 속 장애운동과 동물운동이 반목해왔음을 고려하면, 이는 전례 없는 교차성의 사유를 보여주는 값진 저술이다. 병리적으로 취급되는 존재와 폭력에 취약한 존재를 연결함으로써 서로 다른 삶들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일에 저항하는 테일러의 목소리는 깊은 통찰을 선사한다. 

수나우라 테일러/이마즈 유리 옮김/오월의봄/2만2천원

 

 

치유 일기

 

치유를 뜻하는 ‘힐링’은 사회적인 화두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치유’는 좀 다를지도 모른다. 누적 판매부수 400만 부를 기록한 『한국사 편지』의 저자 박은봉이 한순간에 삶이 와르르 무너진 경험을 겪은 뒤, 9년간 천천히 한 걸음씩 회복해나가며 써낸 기록이기 때문이다. 박은봉을 ‘유명 역사책 작가’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저자의 내밀한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일이겠으나, 저자는 “부끄러움과 망설임을 무릅쓰고” 이 책을 세상에 내보이기로 결심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의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당신만 이런 게 아니라고 일러주고, 저자 자신이 다시 작가로 서기 위해서다. 중년의 여성으로서 겪은 마음의 고통과 신체적 고통을 원숙한 시선으로 벼려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은 워커홀릭이자 슈퍼우먼으로서 살던 저자의 삶과 내면 모두의 변화를 통해 일하는 존재, 양육하는 존재, 욕망을 지닌 존재로서의 여성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존재해왔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의미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박은봉/돌베개/1만3000원

 

 

도로나 이별 사무실

 

‘이별 대행 서비스’가 있다면 어떨까? 연인이나 직장상사, 나쁜 습관 등 지긋지긋한 세상만사로부터 이별하는 일이 사실 인생 아니던가. 유해하거나 위험한 이별도 만연하기에 ‘안전이별’이라는 말이 화두가 될 정도다. SNS를 통해 사람들 간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 같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는 일은 오히려 점점 어려워지는 것만 같은 이 ‘관계 피로’의 시대, ‘꼭 필요한 문제적 소설’을 쓴다는 평가를 받아온 손현주 작가의 장편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도로나 이별’은 세상의 많은 이별을 대행해주는 회사다. 온갖 인간관계에 회의적인 ‘이별 매니저’도 등장한다. 관계 맺기에 절박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이 소설은 이별해도 괜찮다고, 많은 경우 이별은 꼭 필요한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만 우리가 ‘무엇’과 ‘어떻게’ 이별하면 좋을지를 자연스레 고찰하게 한다. 이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우리는 무수히 많은 이별과 만남 속에서 갖출 만한 적절한 자세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손현주/은행나무/1만3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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