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 요구 뜨거운데
‘페미니스트 대통령’의 결론은 낙태죄 유지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5일 기자회견
“당사자 여성의 목소리 들을 시간 있었으나
묵살하고 졸속 의견수렴해 여성들 기만”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도행동이 '여성들 기만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이 '낙태죄 폐지 촉구'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낙태죄’ 개정 시한까지 이제 두 달, 그간 정부는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얼마나 귀 기울였나. “소통은 없었다”가 여성계의 답변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표방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1년 6개월의 장고 끝에 내놓은 결론은 ‘낙태죄 유지’다. 여성의 의견이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결과다.

정부는 지난달 ‘임신 주수에 따른 낙태죄 유지’를 골자로 한 형법·모자모건법 개정 입법예고안을 발표하며 “여성계 등 각계 의견을 수렴했다”고 했지만, 여성단체들은 “졸속 의견수렴과 불통으로 여성들을 기만했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여성들의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정부는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비판했다.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도행동이 '여성들 기만하는 문재인 정부 규탄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이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당사자인 여성 목소리 묵살하고

밀실 논의·‘낙태죄 유지’ 기조 밀어붙여

실제로 그간 정부는 ‘낙태죄’ 개정 논의 공론화는커녕, 여성계와의 소통에도 불성실했다. 청와대는 6~7월에 이미 ‘낙태죄 유지’ 기조를 정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법무부는 정부안을 바꾸려고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를 통해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 권고안을 냈지만 그뿐이었다. 지난 8월 국무조정실 주재로 법무부·복지부·여가부 등 5개 부처가 참여한 차관회의에서는 “종교·여성계 반발은 문화체육관광부·여가부에서 주도적으로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 입법예고 시기를 맞춰 갈등 기간을 최소화한다” “부처 간 원보이스(한목소리)를 유지한다”는 지침이 마련됐다.

‘불통’은 계속됐다. 국무조정실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여성계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다.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고수해온 여가부도 책임 있는 행보보다는 다른 부처의 눈치만 보고 있다. 모자보건법 주무부처임에도 침묵을 이어가던 복지부는 내부 성평등 자문위원회의 의견도 반영하지 않은 시대착오적 개정안을 내놓았다. 복지부가 6~7월간 여성계에 간담회를 제안했다 일방적으로 취소한 게 세 번이다. 지난 4일 간담회는 무산됐다. 참석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불통’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하루 전인 3일 저녁에야 급히 간담회 참석 요청을 받았다. 당일 제공된 논의 자료는 정부 입법예고안 조문뿐이었다. 각계에서 이미 내놓은 의견서나 세부 쟁점은 논의할 준비조차 안 돼 있었다.”(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

“담당 공무원이 생색내듯 ‘이번 모자보건법 개정안으로 미프진 등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가 가능해졌다’고 하는데 마음이 무거웠다. 식약처가 임신중지 약물 허가에 까다로운 태도를 보여 실제 국내 도입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방법을 마련하는 게 복지부의 역할인데 아직도 그걸 모르는 듯했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

“복지부에서 ‘우리가 접수한 의견서 5000개 중에 여성계의 의견이 있으니 듣겠다’고 하더라. 임신중지는 여성의 절박한 현실이 걸린 문제인데, 당사자 의견이 왜 1/n의 의견으로 취급돼야 하나. ‘의견 수렴했다’는 보고서 한 장 만드는 데 우리를 활용하지 말라.”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

다음날인 5일 모낙폐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는 이번 개정안이 여성에 미칠 현실적 영향은 고민하지 않고, 국제 사회의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을 위한 방향으로 법·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라’는 권고도 무시한 채 종교계와 의료계의 눈치를 보며 적절히 타협했다”고 지적했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청와대를 향해 “페미니스트 대통령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인권을 내세우는 대통령이라면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을 위한 요구를 무시하지도 기만하지도 말라. ‘낙태죄’를 완전 폐지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여건을 마련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변화시킬 책임 있는 법제도를 만들라“고 요구했다.

정부 방침과 달리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기세는 뜨겁다. 지난 3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은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소관 상임위인 국회 보건복지위와 법사위·행안위 등에 회부됐다. 여성계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연대단체들은 이대로 정부의 입법예고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단체 행동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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