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건 이후 34년 만에 공개 석상에
8차 사건 재심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
모든 사건 공소시효 지나 처벌은 불가능
“사건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고 생각 안 했다”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가 34년 만에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2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사진은 이춘재가 출석하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 501호 법정. ⓒ뉴시스·여성신문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춘재(56)가 34년 만에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2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다. 사진은 이춘재가 출석하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 501호 법정. ⓒ뉴시스·여성신문

여성 14명을 살해한 우리나라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인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가해자 이춘재(56)가 지난 2일 증인으로 출석해 1980년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경기 화성과 충북 청주에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 14건에 대해 “내가 진범이 맞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1시 30분 수원지법 제12형사부(부장판사 박정제) 심리로 수원법원종합청사 501호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재심 공판기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가 경찰 재수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을 다시 한 번 법정에서 인정했다.

4시간가량 이어진 증인심문에서 이춘재는 첫 번째 살인사건을 저지른 뒤 34년 만에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서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태연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사건 당사자가 아니면 기억해낼 수 없는 구체적인 범행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날 재판은 당초 예정된 시간보다 6분가량 늦어졌다.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윤성여(53)씨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가 “화성연쇄살인사건 진범이 맞냐”고 묻자 “예, 맞다”고 진술해 그동안의 범행을 자백했다.

현재 복역 중인 부산교도소에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사건 때문에 접견왔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모든 것이 스치듯 지나갔다”며 사건 실체가 밝혀질 것을 예감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당시 경찰 조사에서 진술을 거부하려고 했으나 전문 프로파일러 때문에 진술을 하게 됐다”고 34년 만에 범행을 자백한 배경을 말했다.

이춘재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의 DNA를 채취해갔는데 이 때문에 경찰에서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범죄를 저지를 당시 현장에 대해 은폐라든지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DNA 채취하고 금방 경찰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윤씨의 변호인이 “가석방을 희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화성연쇄살인사건)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로 가석방 가능성이 없어질 것을 생각했나”라고 묻자 “그런 생각은 했지만 사건이 영원히 묻힐 것이라고는 생각 안 했다”고 말했다.

이날 재판에서 이춘재는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씨에게도 사죄의 뜻을 밝혔다.

이춘재는 “제가 저지른 살인사건에 대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장시간 수용생활 고통을 겪은 윤 씨에게 사죄한다”며 “모든 일이 제 자리로 돌아가서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고 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2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2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날 법정에서는 윤씨의 변호인이 이춘재 관련 조사를 받고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영상을 소개하며 범행당사자인 이춘재에게 현재의 심정을 물었다.

이춘재는 “저는 제가 한 일에 대해 그 당시에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조사도 받았고, 죽었다는 얘기는 접하지 못 했는데 많은 고통 받고 힘들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다”며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관심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유로운건 아니고 제가 한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가 감내할 부분으로 고통 갖고 모든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사과했다.

이날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이춘재는 길고 갸름한 눈매에 길쭉한 얼굴형으로, 그동안 알려졌던 몽타주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이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하얀 마스크와 파란색 수형복을 입고서 법정에 입장했다. 이어 선서를 하고 재판부의 질문에 차분한 기색으로 답했다. 변호인 질문에도 차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법정에는 변호인과 검사 측 요청 인원, 이춘재를 진범으로 밝혀낸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직원, 취재진 등으로 40여석이 꽉 찼다.

재판부는 실제 재판이 진행되는 501호 법정에서 원격영상을 지원해 다른 법정인 504호에서 이춘재가 증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중계법정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일반인 방청을 허용했다.

오는 19일 오후 4시에는 결심공판이 열린다. 이날 재판에서는 재심피고인인 윤씨에 대한 심문과 변호인 최후변론, 윤씨의 최후진술을 진행하고 검찰이 구형한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당시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자택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잠을 자다가 성폭행당한 뒤 숨진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검거된 윤성여씨는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윤씨는 사건 당시 1심까지 범행을 인정했다. 이후 2·3심에서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했다고 주장했으나 기각됐다.

20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윤씨는 감형돼 2009년 출소했고, 이춘재의 자백 뒤 지난해 11월 재심을 청구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지난 7월 ‘이춘재 연쇄살인사건’ 최종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화성과 수원 등지에서 이춘재가 총 14건의 살인사건과 9건의 강간사건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춘재는 그동안 일명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알려져 있던 10건의 살인사건을 모두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수원과 화성, 청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4건도 이춘재가 저지른 범행으로 추가로 드러났다.

이번 수사를 통해 기존에 드러난 혐의 말고도 추가로 이춘재의 범행이 밝혀졌지만 모두 공소시효가 지나면서 처벌은 불가능하다.

이춘재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현재까지 부산교도소에서 수감생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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