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10월 25일 오전 사망했다. 속보가 나온 뒤 그의 생애와 업적을 전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요일이었지만 노트북을 켰다. 오전 9시45분쯤부터 수십 군데 언론에서 쏟아진 발생기사는 고인의 이름 앞에 ‘한국 경영계의 거목’ ‘경제계 큰 별’ ‘1등 기업 일군’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그리고 25분 뒤 온라인에 송고된 여성신문 첫 부고 기사 제목은 <‘여성 인재 중용’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별세>였다. 나는 기사에 이 회장의 사망 소식과 함께 여성 대졸 공채를 처음 시작하는 등 여성 인력 채용에 앞장섰고 여성 인력 중용을 강조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고인’에 대한 호평만을 담은 기사였다. 후속 기사에서 명암을 담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월요일 출고된 ‘삼성그룹 이끈 고 이건희 회장의 빛과 그림자’가 그 기사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부고 기사가 알려지고 비판이 나왔다. ‘여성인재 중용’만을 강조한 기사에 실망했다는 지적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이라고 하기에는 이 회장이 남긴 부정적 유산은 적지 않다. ‘여성 인재 중용’의 경우, 사실이지만 모든 맥락을 드러내는 진실은 아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건강과 생명을 잃은 많은 노동자들도 여성 인재였다. 여성신문이 그동안 보도한 삼성반도체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들의 요구를 외면한 삼성의 행태를, 나는 이 부고 기사에서 지웠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미디어 환경이 변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질수록 기자로서 글을 쓰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매번 악성댓글 홍수를 겪으면서도 많은 여성들의 격려가 있어 힘을 냈다. 지지를 보내던 여성들이 이번에는 기사를 비판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여성신문은 지난 2018년 창간 30주년을 맞아 출간한 『세상을 바꾼 101가지 사건』에 ‘삼성반도체 노동자들 잇단 암 발병·산재투쟁’을 62번째 사건으로 꼽았다. 2012년 당시 기사는 <삼성 반도체공장 노동자의 지난한 투쟁은 대기업의 횡포와 부도덕성을 우리사회에게 드러낸 사건이다>라고 정의했다.

이번 부고 기사는 여성신문의 이름을 걸고 내놓은 기사로 어울리지 않았다. 공로와 과실을 균형 있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널리즘과도 거리가 멀었다. 반성한다. 많은 여성 노동자들께도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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