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2018년 11월, 울산의 모 병원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아 숨지게 한 후 시신을 야산에 버린 1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여성은 경찰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갔는데 출산을 해서 너무 당황해 유기했다”고 진술했다. 2018년 6월 경기도 오산에서는 10대 여성이 아이를 낳은 후 용기에 시신을 넣어 아파트 화단에 버린 사건이 있었다.

많은 언론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비슷한 보도를 반복한다. 어린 여성들이 ‘영아살해’ 혐의로 입건된 데 주목하며 “요즘 10대들의 성적 일탈이 심각하다”고 지적하는 식이다. 이 여성들이 아이를 갖고 싶었는지, 임신했다는 것은 언제 알았는지, 임신 사실을 아이 아빠나 가족, 친구, 교사 등에게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는지, 불편한 몸으로 학교는 제대로 다닐 수 있었는지, 전문가의 도움 없이 홀로 출산이라는 거대한 사건을 감당해야 했는지, 사건 이후 그들이 학교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지는 묻지 않는다.

몇 년 전 싱글맘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참여하면서 계획에 없던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정 나이에 도달한 여성과 남성이 만나 연애하고, 주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하고, 성관계를 갖고 임신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정상’ 과정을 밟지 않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 저 과정 중에서 한 단계라도 빠뜨린 여성과 그 아이에게는 ‘비정상’, ‘미숙’, ‘비도덕적’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정상가족 신화가 허물어진 오늘날에도 강력하게 작동하는 편견과 낙인이다. 보란 듯이 잘살아 보려고 해도 사정이 알려지면 ‘불쌍한 여자’ ‘어딘지 결함 있는 가족’이라는 시선부터 따라왔다. 아이 아빠가 잠적하면서 스물에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른 여성은 본래 무척 사교적인 성격이었으나 학부모 모임과 동창회에서 ‘미혼모’ 뒷말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점차 피하게 됐다. ‘어릴 때부터 해봤을텐데 남자 맛이 그립지 않냐’는 직장 상사의 성희롱을 신고하고 보복성 해고를 당한 여성도 있었다. 임신, 출산, 육아로 고교를 중퇴해야 했던 여성은 아이가 ‘엄마가 중졸이라 부끄럽고 싫다’고 말하자 자살하고 싶었다고 했다. 존중받지 못하는 삶을 원하는 여성은 없다. 그런 설움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엄마는 없다.

‘낙태죄 폐지’ 요구가 높아지기 훨씬 전부터 많은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선택해왔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존재니까. 그래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성 인식을 높이려면 ‘낙태죄’가 필요하다고? ‘낙태죄’가 여성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공격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을 알고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애초에 성이 강력한 금기인 나라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도 성평등 교육도 못 받고 어른이 된 인간에게 성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기대하는 것은 모순이다. 요즘도 교육 당국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르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2020년에도 키워드는 ‘보호’와 ‘통제’다. 섹스란 매우 위험한 것이라서 남에게도 나에게도 고통과 상처를 남길 수 있으니 조심하고 공개적으로 언급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데 그쳤다. 어린 성폭력 가해자들과 ‘n번방’ 가해자들은 그런 풍토에서 싹텄다.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주수의 제한과 자격 입증 요건이 아니라, 평등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관계를 할 수 있고, 임신과 출산 관련 믿을 만한 정보와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미래다. 여성들의 지지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여성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국민의 성적 권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책임을 저버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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