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즈버그 대법관이 1993년 자신을 새 대법관으로 지명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워싱턴국립공문서관
미국 진보 진영의 아이콘이자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1993년 자신을 새 대법관으로 지명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워싱턴국립공문서관 

 

얼마 전 별세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는 1933년생이다. 그는 평생을 살면서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유리천장’을 마주했을까? 특히 법조계처럼 관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분야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실력을 펼치기도 전에 유리천장에 부딪히곤 한다. 긴즈버그가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던 1956년, 당시 학장이 “왜 유능한 남성의 자리를 빼앗으면서 이곳에 입학했는지” 물어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명망 있는 교수들이 동석한 식사 자리에서였다. 당시 긴즈버그는 “남편이 먼저 입학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남편의 일을 더욱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답변을 하고는 그 날의 기억에 대해 평생 후회했다. 너무나 수세적인 태도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왜 그런 ‘정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을까?

동일한 ‘스펙’에 성별만 다른데
연구 참여자들 “남성이 더 유능”

심리학자 메이들린 하일만(Madeline Heilman)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상을 사회심리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쉽게 말해서, 잘난 여성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겨있는 심리가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추적한 것이다. 하일만은 성공한 여성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을 테스트하기 위해 다수의 실험 연구를 진행했는데, 연구 결과가 너무도 선명하고 적나라해서 읽을 때마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된 이 연구의 설계는 매우 간단하다. 흔히 ‘남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직업에 종사하는 가상의 인물 프로필을 만든 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프로필에 이름만 바꿔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구팀은 항공기 제조업체 전무이사의 프로필을 만들어 연구 참여자들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전무이사는 엔진이나 연료 탱크와 같은 항공기 부품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했고, 고객 관리, 시장 개척, 판매 실적 등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프로필에는 이와 같은 직무 설명은 기본이고, 출생지, 학력, 학점, 재직 기간 등의 정보를 망라한 매우 상세한 이력서가 첨부되었다. 이 동일한 프로필에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어떤 프로필에는 여자 이름, 다른 프로필에는 남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는 점뿐이었다.

실험 1. 위와 같은 동일한 프로필에 한 가지 조건이 달렸다. 해당 전무이사는 아직 금년도 인사평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실적이나 업무 능력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프로필을 보여주면서 전무이사들이 얼마나 유능한지 평가해달라고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연구 참여자들은 동일한 이력서인데도 남성이 더 유능하다고 답했다. 반면 호감도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남자 이름이 붙어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의 업무 수행 능력이 더 높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는 젠더에 기반한 편견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적이고 분노할 만하다. 여성들은 이력서를 내는 순간부터 불리한 게임을 해야 한다는 점이 통계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일만의 연구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후속 연구에 반전이 있다.

가족법 개정, 호주제 폐지를 위해 매진했던 여성변호사 이태영의 정의의 저울. ⓒ여성가족부
한국 최초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가 사용한 정의의 저울. ⓒ여성가족부

 

"스펙도 성과도 우수" 평가 붙자
연구 참여자들, 여성은 '비호감' 평가

실험 2. 이번에는 프로필에 다른 조건을 넣었다. ‘해당 전무이사는 금년도 인사평가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모든 면에서 업무 성과가 우수해서 실적이 상위 5% 안에 드는 우리 회사의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설명이 들어갔다. 누가 봐도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이른바 범접할 수 없는 ‘스펙’을 갖고 있어서 딱히 흠 잡을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연구 참여자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유능하다고 평가했고, 두 그룹 사이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항목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여성 전무이사들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가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다. 잘 나가는 여성 전무이사는 이른바 ‘비호감’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여성 전무이사들이 적대적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했는데, 해당 항목은 ‘까칠하다’, ‘이기적이다’, ‘강요하려 든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동일한 프로필이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이런 성향을 읽어낸 것일까? 참여자들이 받은 정보는 그가 ‘감히 여성’이라는 점 하나뿐이었다.

“유능하고 두 아이의 엄마” 평가에
여성에 대한 반감 요소 사라져

실험 3. 하일만의 연구는 여기서 정점을 찍는다. 이번에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유능해 보이는 재무총괄 부사장의 프로필을 만든다. CFO와 비슷한 직책이니 ‘남성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연구 결과는 역시나 비슷했다. 즉, 남성 부사장과 비교할 때, 여성 부사장의 호감도는 낮게 나온 반면 적대적 성향은 높게 나왔다. 그런데 연구진은 여성 부사장 프로필에 다음과 같은 소개글을 추가한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곧 우리 회사 근처로 이사할 예정이다.’ 새로운 프로필에 대한 응답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두 아이의 엄마라는 문구가 가진 힘은 너무도 강력해서, 여성 부사장을 향한 반감 요소가 모두 사라졌다. ‘여성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으로서 모성과 여성성을 증명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성혐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유리천장은 단순히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리천장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마주하는 것은 바로 여성혐오다. 위에서 언급한 일련의 연구들은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여성혐오를 숫자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하일만은 이에 대해서 ‘여자들은 성공한 죄로 벌을 받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남자들만의 클럽이던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던 긴즈버그는 아마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적 가치를 내세워야한다는 점을. 그래서 그는 반사적으로 ‘남편의 아내로서 이 자리에 왔다’고 답한 것이 아닐까?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 참석해 류호정 의원의 삼성전자 부사장 증인 채택 무산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사진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 참석해 류호정 의원의 삼성전자 부사장 증인 채택 무산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사진

 

소위 ‘남성의 일’에 도전하는 여성에게
“기세다” “뭘 안다고” 쏟아지는 여성혐오

한국 사회에서도 여성혐오는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정치계, 법조계 등 ‘남성의 일’이라고 간주되는 영역에서 더욱 그렇다.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국회 부의장이 된 김상희 의원은 ‘남성이 주도하는 정치 영역에 존재하는 공고한 유리천장을 깨뜨리겠다’고 말했지만 여성 정치인들은 여전히 불필요한 소모전을 해야 한다. 정치인 신지예는 선거에 출마할 때마다 벽보가 훼손되는 사건을 겪었다. 단순히 벽보를 뜯는 수준이 아니라, 눈을 불로 지진다거나 얼굴을 공격하는 형태로 명백한 혐오감정이 담겨있었다. 정의당 류호정 의원 관련 기사에는 수준 이하의 여성혐오 댓글이 달린다. 심지어 삼성전자 임원이 기자증으로 국회를 드나들었다는 점을 밝혀낸 활약상을 보도하는 기사에도 “네가 뭘 안다고” 같은 댓글이 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을 잘해도 (혹은 위의 연구 결과를 빌리자면 일을 잘할수록!) 못마땅한 것이다.

여성들은 한계를 넘으려 도전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장애물을 만나고, ‘남성의 일’에 도전하면 견제를 받는다. 상냥하고 고분고분해야 할 젊은 여성이 내게 감히 반대 의견을 낸다니 참기 힘들다고 느낀다거나, ‘저 여자 능력 있는 건 알겠는데 기가 세서 비호감’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성혐오를 내면화한 탓이다. 실제로 성공한 여성들에게 따라붙는 형용사들은 성공한 남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저 여자는 왜 이렇게 기가 세지?” “ㅇㅇㅇ 장관, 사석에서 만나면 아주 사납다던데.” 이런 문장들에 남자 이름을 넣으면 뭔가 어색하다. ‘기가 세다’, ‘드세다’, ‘사납다’는 말은 유독 여성을 비난할 때 쓰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하다. 여자다운 모습을 보이고 온순하게 굴어야한다는 자신의 요구를 배반하는 순간,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한 질문과 비난을 마주해야 하는 이들은 오래 전 긴즈버그만이 아니다. 2020년의 한국은 어디쯤에 있을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과 의지를 의심받아서는 안 되며, 그 누구도 혹시나 미움 받을까 걱정하면서 소신을 굽히는 상황에 처해서도 안 된다. 큰 뜻을 품은 젊은 여성들이 여성혐오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까? 유리천장에 균열을 내는 당당하고 정의로운 이들을 응원하며, 수많은 여성들이 다함께 유리천장을 부수고 하늘 높이 비상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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