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⑤] 조선 의녀와 김점동 이후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⑤] 조선 의녀와 김점동 이후 ‘여의사’
  •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
  • 승인 2020.10.17 08:45
  • 수정 2020-10-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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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 무엇일까? 진지한 국제 학회에서 심도있는 토론 후 결론적 답은 조산사다. 조산사라는 직업(놀랍게도 여성의 직업이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데 학계는 이견(異見)이 없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출산을 돕는 것은 두 생명을 동시에 살리는 의학적 역할이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 의사, 조산사 직업들이 분화하기 훨씬 전 예전에는 여성의 출산을 돕는 역할을 그 마을에서 출산을 도운 경험이 가장 많은 어른 여성, 즉 산파 혹은 조산사가, 또는 가족 중 어른이나 친정엄마, 시어머니, 친척, 친지 여성들이 수행했을 것이다. 인류가 태어나고 출산이 거듭되며 조산 역할이 과학과 의학발전과 더불어 의학의 전문 영역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사료로 보면 서양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산파, 조산사는 등장하고 성경에도 나온다. 동양에서는 중국 송대 의학서 ‘태평혜민화제국방’(1110년 편찬)에 산파 용어가 등장하고, 우리나라에도 산할머니, 산파들의 용어로 발전되어 이미 이조시대인 1706년(숙종 32년) ‘전록통고’에 산파에게 급료를 지급한다는 규정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 의녀들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이 산파의 역할이었다고 많은 문헌에서 지적하고 있다. 새 생명의 탄생과 산모의 생명과 안전을 다루는 조선시대 여성의 전문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성들이 관여한 조산의 영역이야말로 여성 및 미래세대 건강과 직결된 실로 중요한 의학의 영역이다. 그 이후 의학화(medicalization) 되면서 산과가 남성들이 관여하는 영역화 되었고 현대에서는 산부인과, 그 중에서도 온갖 중환과 태아의 문제를 한꺼번에, 두 생명을 함께 고려하며 돌봐야 하는 산과 세부전공이 되어 날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의사 관련 제도권의 발전을 논의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 여자의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드라마 ‘대장금’으로 친숙해진 조선시대의 의녀제도를 잠시 고찰해 본다. 개화기 여의사 출현 전 의녀제도는 태종 이후 조선왕조 전 시대를 통해서 지속하였던 의료제도이고 우리나라 의학사상 그 의의가 컸으며 여성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 연재가 역사학적 기록을 바로잡는 데 있지 않으므로 자세한 고증과 고찰을 모두 할 수 없었다. 수십편의 논문들과 책들을 섭렵하였으나 여의사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의녀는 물론이고 근대사, 현대사 모두 논문마다, 책마다 다른 부분이 매우 많아 언젠가 정확한 고증에 입각한 정확한 사료들이 연구되고 정리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 연재가 하나의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 제생원 터 표지석. 의녀 교육과 여성을 포함한 서민 진료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제생원 터 표지석. 의녀 교육과 여성을 포함한 서민 진료가 이루어졌다.

 

1406년 창설된 의녀 제도

조선 이전 역사에는 의관 또는 의원이 남녀를 차별하여 진료했다는 기록이 없다. 다양한 사료들에 근거하면, 조선 건국 후 유학규범을 강조하며 남녀유별이 문제가 되기 이전 시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고 남녀를 불문하고 의학의 혜택은 비교적 고르게 받았을 가능성이 크게 추측된다. 1392년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위민, 민본 등 국민 보호를 강조하였는데, 이현숙은 ‘한국의학사’에서 의학으로 대표되는 ‘활인(活人)’이 조선의 이상적 정치철학인 ‘인정(仁政)’의 하나로 부각되었다고 설파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 건국 후 삼강오륜에서 유래한 ‘남녀칠세부동석’의 ‘내외법’이란 관습법이 만들어지며 양반 부녀자들이 남자의원 진찰과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게 되자 부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의원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 지제 생원사(知濟 生院事) 허도의 상소로 태종 6년(1406년)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담당하였던 ‘제생원’에서 의녀를 양성토록 윤허를 받았다. 허도의 노력으로 태종 6년에 의녀제도가 창설되어 제생원에서 의녀를 양성하게 되었으나 이는 중앙의 의녀제도였는데, 17년 후 세종 5년(1423년)에 또 다시 허도의 상소로 지방 부녀자들도 의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의녀제가 확대 실시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활인 철학에 입각, 양반 출신들이 의원진출을 많이 했고 특히 태종, 세종시대에는 백성들의 생명을 중시하는 의료제도를 매우 중하게 여기면서 의료제도 및 의학발달이 함께 이루어졌다. 세종시대에는 세종의 의학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의녀제도가 발전하였으며 그 당시 소비라는 의녀가 상을 제수한 기록도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왕비 가마 뒤쪽 양쪽에 의녀들이 따랐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왕비 가마 뒤쪽 양쪽에 의녀들이 따랐다.

 

조선시대 의녀에게는 현대의 직업으로 보면 의사, 약사, 간호사의 혼재된 역할이 부여되었지만 본업은 치료와 간병, 더욱이 산파(조산사)로서의 기능이 중시됐다. 당시에 의녀는 남성의원의 보조역할을 수행한다는 특수성으로 유교적 관습이 점차 사회적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중서계급에 속한 여자들은 이 업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아 시간이 가며 점점 관비 중에서 비교적 영리하다고 판단된 동녀들을 선발하게 되었다.

제생원에서는 주로 부인과 및 산서를 가르쳤으며, 일단 후보로 선발되면 초학이라고 하여 오직 학업에만 전념케 했는데 대략 3년에 걸쳐 천자문, 효경, 정속편 등 우선 책으로 글을 배운 뒤 인재직지맥, 동인침혈침구경, 가감십삼방, 태형제국방, 부인문산서 등 의서를 익혀야 했다. 또한 기초교양으로 사서, 논어, 맹자, 중용을 읽히기도 하였다. 인명을 다루는데 필요한 전문적 의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적 덕목을 갖춤이 우선으로 의료인 자질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의녀들은 신분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여성으로 최고의 지식층이었다.

한희숙은 저서 ‘의녀’에서 의녀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의녀의 의료행위는 주로 진맥, 침과 뜸, 약으로 나뉜다. 기본적인 의료지식은 모두 익혔겠으나 전문성에 따라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되었다. 또한 특별히 가장 우수한 의녀들이 궁중의 산실청, 호산청에 선발되어 왕비와 후궁들의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한류를 일으킨 드라마인 ‘대장금’은 성종(재위 1469∼1494) 대의 피부질환에 일가견이 있던 1480년대까지 활동한 제주 출신 ‘장덕’과 중종(재위 1506∼1544) 대의 ‘(대)장금(기록에 1515~1544 활동)’을 동시대에 함께 출현하게 했던 픽션이 가미된 드라마다. 중종 대에는 내의녀 중에서 뛰어난 의녀는 임금을 보살피는 어의녀로 삼았다. 특히 대장금은 중종이 승하하는 날까지 굳건한 신임을 얻으며 의료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조선시대 의녀 중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로서 중종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몸을 믿고 맡긴 여의로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의녀의 기록은 구한말 고종 대까지 연결되었다. 

서울 재동 제중원.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 31쪽.
서울 재동 제중원.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 31쪽.

 

연산군 시절 폭군 명성답게 의녀로 하여금 약방기생을 하도록 폭압하여 대부분 관비 출신의녀가 많아 저항하지 못하고 연회에도 차출되었으나, 통상 조선시대 의녀들에게는 정기적 급료도 주어지고 간헐적 포상, 훌륭한 의술을 펼쳤을 경우에는 면천하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 이제나 예전이나 한번 잘못되어 좋은 제도가 무너지면 무너질 때는 속절없이 무력하게 무너지나 다시 세우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바, 연산군 후에도 상황이 쉽게 복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직후 중종 대에도 어의녀가 된 대장금도 존재하고, 훌륭했던 의녀들의 진화된 다양한 역할이 이조실록을 비롯 기록으로 전해진다.

히포크라테스가 이미 간파했듯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예술은 바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활인의 역할, 즉 인술인 의술을 뜻했다. 비록 출신은 양반이 아니었으나 의녀들은 사서삼경을 공부하였고 전문적인 의술, 진맥, 침과 뜸, 약제조, 출산을 돕는 조산의 역할까지 더 익혔다. 다양한 의료현장에서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특히 남녀유별한 유교사회 조선에서 여성들의 생명을 위한 의술을 펼친 의녀들의 존재는 의료사적 관점만이 아니고 우리의 여성사에서도 빛나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에 수록된 서울 재동 제중원과 제중원 의학교 배치도. ‘연세의사학3’ 50쪽.
제중원 일차년도 보고서에 수록된 서울 재동 제중원과 제중원 의학교 배치도. ‘연세의사학3’ 50쪽.

 

김점동 전후 우리나라 서양의학 교육

다시 구한말 고종 시대, 우리의 김점동 선생님 삶 곁으로 가보자. 점동이 1877년 3월 16일 태어나고 8세 되던 1885년 4월 10일 서양의학 기관인 제중원(시작은 광혜원)이 알렌에 의해 문을 연다. 알렌은 제중원 시작 후 다음 단계로 조선인 의사양성을 위한 의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알렌은 1885년 12월 1일 당시 미국 공사였던 폴크를 통해 ‘의학당’ 설립을 조선 정부에 요청했고, 정부는 각 도에 공문을 보내 필요한 인재를 차출하여 선발시험을 치르게 된다.

1886년 3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의학 교육이 알렌, 헤론과 언더우드에 의해 정식으로 선발된 16명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영어를 숙달시킨 뒤 수학, 물리, 화학 등 기초과학을 가르치고 이어 해부학, 생리학 임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쉽지 않은 과정으로 2년 정도 유지되다 의학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중단되었다. 분석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긴 수학 기간이 부담이었는데, 조혼 풍속으로 인한 가정 가진 학생들이 수입 없이 장기간 낯선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다는 큰 이유도 있었다. 이후 초기 의학생 대부분이 관료로 입신하게 되었다. 당시 결실을 맺지 못하였지만 후에 공식적 의학교육의 밑거름이 되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 주도로 창간한 독립신문은 위생의료 분야의 활동과 계몽을 위해 의학교 및 병원 설립 여론을 주도했다.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최초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고 7월 만민공동회에서는 학부대신에게 서양의학을 배울 수 있는 의학교 설립을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른다. 11월 지석영은 학부대신에게 의학교 설립에 관한 청의서를 제출하고 의학교 교장으로 자신을 천거했다. 대한제국은 의학교 설립안을 곧바로 수용하여 1899년 3월 ‘의학교 관제’가 마련되었다. 1899년 9월 4일 50명으로 개교한 의학교는 3년제로 1902년 7월 졸업시험을 치렀는데, 19명이 통과하였으나 부속병원이 1902년 8월에야 개원하였으므로 의학생들은 실습을 마치고 난 1903년 1월 졸업식을 치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일본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1900년 8월 2일 귀국한 김익남은 의학교에 교관으로 합류하여 탁월한 능력으로 의학교 교육을 주도하였고 후에(1901년부터로 추정)는 여가에 사저에서 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00년 10월 귀국 직후부터 의료현장에서 환자를 바로 진료하기 시작한 김점동(박에스더) 선생님은 우리 국민 곁의 진정한 활인의사로 고국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제 다음 편에서는 김점동의 후예, 대한민국 여의사들의 발전사를 살펴본다.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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