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미술의 시초
한국전쟁이 남긴 참혹함을 추상으로 승화

Lee SeDuk (이세득, 李世得, 1921-2001), Image, 1984, Oil on canvas, 53×65cm ©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Lee SeDuk (이세득, 李世得, 1921-2001), Image, 1984, Oil on canvas, 53×65cm © Image Copyright Lee SeDuk Estate (사진=유족 제공)

한국 현대미술은 1930년대 초반에 서구의 모더니즘(Modernism) 받아들이면서 1930년대 후반 김환기(金煥基, 1913-1974), 유영국(劉永國, 1916-2002), 이규상(李揆祥, 1918-1967) 등에 의해 독자적인 추상미술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했고, 전쟁 암울한 시대적 상황은 부패한 보수 화단에 대한 저항의식과 맞물리면서 낡은 구상 양식에서 벗어나 추상적 흐름 속에서 미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의 문물과 현대미술을 우리 술계를 이끌어갈 여러 단체들이 출범한다. 625전쟁 이전부터 서구 미술을 한국에 가져온 일본 유학파 미술인들의 부류로 서구의 모더니즘 미학과 비교 연구의 전통을 계승한 미술 그룹인모던아트협회(Modern Art Society, 1957-1961)’, ‘신조형파(新造型派, 1957-1960)’ 그리고창작미술협회(創作美術協會, 1957-1970)’ 있고, 수묵과 서체 중심의 전통 화단 내에서 현대적 방향을 모색한 미술인들의 부류인백양회(白陽會, 1957-1978)’, ‘묵림회(墨林會, 1960-1964)’, 그리고 서구 미술을 전적으로 도입하여 새로운 미술 세계를 추구했던 한국 앵포르멜의 주역현대미술가협회(現代美術家協會, 1956-1961)’ 등이 있다.

 

사실 새로움을 향한 몸부림은 서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유럽 사람들은 2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의 처절함, 불안, 고독, 허무감, 절망 등의 감정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그들은 과거에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을 불신하고 부정하며, 실존의 본질과 구조를 밝히려는 철학적 입장인 실존주의 사상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 특히 미술은 오랫동안 입체주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던 프랑스에서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된 기하학적 추상미술 반발하여 기존의 양식에 반하는 다른 예술을 잉태하고자 했다. 앵포르멜(Informel) 운동의 탄생이다. 한편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추상표현주의 예술 경향을 보였다. 좁은 의미로서의 추상표현주의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주변의 움직임을 포함하여 순수 추상과 기하학적 추상에 대립하는 태도였다. 이렇듯 서양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서로 대응하는 예술 동향을 보였고, 인간 본래의 어둡고 좌절된 고독함과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독창성과 개성을 찾는 탐구에 주력하였다.

 

 

Kwon Okyeon (권옥연, 權玉淵, 1923-2011), Halo 2, 1995, Oil on canvas, 140×162cm ©artsy, Seoul Auction: 27th Hong Kong Sale

최고운 큐레이터= 권옥연은 한국 앵포르멜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연과 인간의 모습을 풋풋한 향토적 체취가 강하게 배어 나오는 한국적 소재주의, 목가적, 서정주의적인 특징을 지닌다. 작품은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비정형의 형태와 두터운 마티에르, 청회색으로 억제된 색채 등이 한국의 토속성과 잘 융합되어 있다.

 

이러한 세계적 흐름은 우리나라로 스며들고, 승화되어 한국의 앵포르멜이 되었다. 앵포르멜은본질은 무엇인가 귀중한 신조로 생각하는 실존철학의 영향에서 재료 자체가 갖는 물질성을 본질로 보고, 유화 재료의 고유성 마티에르(matière)’ 두껍고 강하게 강조했다. 또한 기존의 형식주의적 형태관을 거부하고 화면에 불규칙적을 허용한다는 것이 가장 특징이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재료 구입 어려운 시대적 상황 마티에르를 두껍게 하기 위해 표현 가능한 대체 재료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시멘트 부스러기, 석고, 철판, 마대 등을 오브제로 썼으며 흰색 아연화(흰색 안료와 보일유) 등으로 마티에르를 표현하며 서구 문화의 충돌점을 우리만의 해석으로 풀어나갔다. 기법뿐만 아니라 동양적 정서와 한국 특유의 정신성 내면화 작품에 투영시켰다. 작품 활동에 있어 동양적인 기법, 재료, 한국적 소재의 선택으로 근본정신을 전통에서 찾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서구의 앵포르멜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내지는 개인적 필요에 따라 재해석하여 현대적인 시각과 우리만의 미술로 재창조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한국전쟁이 남긴 참혹함은 우리를 프랑스의 앵포르멜 예술세계를 공감하게 했고, 우리의 전통과 추상이 앵포르멜 미학과 만나 한국만의 독특한 미술적 미감으로 표출된 것이다.

Ha Indoo (하인두, 河麟斗, 1930–1989), Untitled, 1988, Oil on canvas, 65.1×80.3cm ©artnet

“하인두는 해방 직후에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화가로, 해방 한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작가이다. 1957 박서보, 김창렬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의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전후 한국적 앵포르멜(Informel) 양식을 주도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후 1962 그룹악튀엘(Actuel)’ 실험적인 미술단체에서 활동하며 작품을 발표했고, 1970년대 이후 자신만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정립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출처: PROSPECTIVE ARTIST/15》전시 보도자료 발췌)

 

 

한국 앵포르멜은 추상미술 현대화의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 현대미술은 1980년대 초의 민중미술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추상미술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미술 정신과 기법은 지금까지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작품에 다양하게 응용되고 기에 한국 현대미술사에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앵포르멜은 미술계의 전체를 뒤덮은 변혁으로 화단 전체에 파급되어갔고 앵포르멜 미학을 스스로 자기화하려는 자각과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는 2 파리 비엔날레(1961) 상파울루 비엔날레(1965) 등에 진출하며 성과를 거두어 독자성을 인정받았다. 동양적 예술관을 모태로 삼아 우리만의 독자적인 한국 미술 역사에서 하나의 사조 거듭난 것이다.

지난 9월 24(현지시간), 미국 그래미 뮤지엄(GRAMMY Museum) '컬렉션 : 라이브'(COLLECTION : live) 초대된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 RM 진행자 스콧 골드먼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일곱 명은 모두 다른 취향과 색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빔밥이라는 한국 음식이 있어요. 여러 가지 다른 재료가 들어가는데, 섞이면 훌륭한 음식이 되죠. 우리는 그런 그룹 같습니다."

옛말에 우리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와닿는 요즘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리고 예로 한국의 앵포르멜을 들고 싶다. 세계적인 K-, K-무비, K-드라마를 만든 K-컬처는 결코 우연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참고 문헌> 1. 최은영, 한국 앵포르멜 회화의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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