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낙태죄, 정부가 살렸다
죽은 낙태죄, 정부가 살렸다
  • 김서현 기자
  • 승인 2020.10.08 06:40
  • 수정 2020-10-08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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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14주까지 허용
정부 입법예고안 파장
성범죄·혼인 파탄 등
24주도 조건부 인정
여성·국회·의료인 등 각계
“역사적 퇴행” 전면 비판
2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지난 9월 28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낙태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정에 따라 정부가 내놓은 형법 개정안을 받아 든 여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오는 12월31일까지 다른 법안이 입법되지 않는다면 정부안은 40일의 입법예고 기간을 거쳐 국회에 그대로 제출된다. 

7일 정부가 임신주수 14주까지의 낙태에 대해 허용하는 형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전면 폐지를 위해 수십년 간 투쟁한 여성들은 일제히 행동에 나서고 있다. 형벌권을 존속시키고 의료인의 시술 거부권까지 담은 정부안은 낙태죄의 폐지가 아닌 존속이라는 주장이다.

법무부·보건복지부·식품의약처가 이날 발표한 정부안은 임신주수에 따른 허용 가부를 나눈다. 임신 14주까지의 임신 중절은 요건 없이 임부의 의사에 따라 허용한다. 15주 1일차부터 24주차까지는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로 보고 상담 및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의무로 한다. 아울러 자연유산 유도약물을 허용, 도입한다.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 임신중절 진료 거부도 허용한다.

정치권에서도 정부안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 기자회견을 열고 “헌법재판소 판결 1년 6개월 만에 내놓은 것이 지난 66년간 여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 찍어온 낡은 법체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라며 정의당의 당론입법으로 낙태죄 완전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라며 추후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하는 내용의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 발의를 예고했다. 여성의당은 온라인을 통한 캠페인열고 소수정당이 모여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이들은 자신의 SNS에 ‘#500인의_여성이_말하는_낙태죄_폐지’ 해시태그를 달고 낙태죄 완전 폐지를 요구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올리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며 이후 음성 파일을 입법부와 행정부에 전달할 예정이다.

7일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국회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페미당당 활동가들이 시위하고 있다. 사진=페미당당
7일 정부가 형법상 낙태죄를 유지하되 임신 초기인 1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자 국회 앞에서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하는 페미당당 활동가들이 시위하고 있다. ⓒ페미당당

 

여성단체는 긴급행동에 나섰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은 성명을 발표하고 “낙태의 허용요건은 불필요한 입증을 요해 불평등을 유지시키는 조항”이라며 “임신 주수에 따른 허용 시기의 구분은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을뿐더러 법의 명확성의 원칙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성명을 발표하고 이번 정부안을 ‘실질적 처벌’로 규정했다. 여성연합은 “그 어떤 여성도 임신중지로 처벌받지 않도록 형법에서 낙태죄 조항을 전면 삭제하라”며 “안전한 임신중지를 포함한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 마련으로 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라”고 촉구했다. 여연 측 관계자는 “긴급한 문제 상황으로 판단한다”며 추후 전국 단위의 릴레이 기자회견 등을 이어나가며 적극적으로 행동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미래사회연구소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는 ‘낙태죄 전면 폐지와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을 올렸다.. 해당 청원은 임신 중단 여성 및 의료인에 대한 처벌의 전면 폐지 및 인공 임신중단 의료의 안전성과 경제성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청원은 5일 공개돼 7일 오후 3만 여명의 동의수를 얻었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정 이전부터 오랜시간 낙태죄 폐지 운동을 해온 활동가와 전문가들은 전면적 폐지를 요구했다. 일정 주수에 따른 임신 중지 허용이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경험과 환경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주기적이지 않은 월경으로 인해 임신 사실을 늦게 알거나 금전적 문제, 가정·사회 공동체 속에서의 여건 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허용주수를 둘 경우 시술 시기를 늦출 뿐이라는 지적이다.

국제사회의 흐름은 낙태죄의 전면폐지로 향하고 있다. 30~40년 전 임신중지를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여러 국가에서 폐해가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는 2018년 12주내 임신 중지 허용과 상담과 숙려기간 의무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3일의 숙려기간 후 방문한 병원에 담당 의사가 부재 중인 상황이 연거푸 일어나며 임신 12주를 넘겨 법의 처벌을 받는 사건이 알려져 낙태죄 전면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일어났다.

세계보건기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 등은 안전한 임신중지에 영향을 미치는 법과 정책적 규제 조치 및 처벌 조항을 전면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지난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는 앞서 한국의 안전하지 않은 낙태 실태를 지적하며 한국 정부에 낙태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 대표)는 “정부안은 결국 처벌을 상세화 하는 안”이라며 “상담과 숙려기간의 의무화는 당사자의 의료서비스 접근권을 멀어지게 할뿐더러 의료인 거부권까지 보장함으로써 적절한 시기의 임신 중단을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또 “산부인과의 수가 적은 지방의 경우 의료 접근권이 더 보장되기 어려운 만큼 사실상 이번 정부안은 낙태 한 여성을 그대로 처벌하겠다는 의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위원장은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 문제와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문제가 이번 정부안에서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정 위원장은 “의료적으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것이 핵심이고 접근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건강보험 적용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어야 한다”며 “임신 중단 자체를 형법으로 처벌하는 상황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와 의료 상담, 시술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편 경향신문에 따르면 정부가 낙태죄 형법·모자보건법 개정 입법예고안을 내놓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이 청와대의 낙태죄 존치 의지가 강했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앞서 법무부가 양성평등정책위원회를 통해 전면 폐지 권고안을 낸 것과는 배치되는 됐다. 주요 여성단체·의료인 단체 또한 입법예고안 발표 전까지 공식 간담회를 통한 정부안 공유를 받지 못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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