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이이효재 선생님] 지행합일의 아이콘!
[내가 기억하는 이이효재 선생님] 지행합일의 아이콘!
  • 오한숙희 사단법인 누구나 이사장
  • 승인 2020.10.08 06:45
  • 수정 2020-10-07 2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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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일왕 방미 규탄 시위를 하는 모습.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1994년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일왕 방미 규탄 시위를 하는 모습.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1989년 1월 초였다. 이웃에 사는 선배로부터 이효재 선생님께 세배를 가자는 연락이 왔다.

“그런데 아이는 데려오지 마”

돌잽이 딸을 키우던 나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싫어하시나보다, 독신으로 살아오신 분이니 그러신가 보다 했다.

은평구 신사동의 한 아파트, 선생님께서 마련하신 음식상 앞에 10여명의 제자들이 모여 앉았다. “얘들아 너희들 이런 책 읽어 보았니?”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식사를 마쳐갈 무렵 선생님께서 꽤 두꺼운 책을 들어 보이셨다. 최근에 나온 책이었다. 핵심내용을 말씀하시며 둘러 앉은 제자들 중 하나를 향해 “네 논문 주제가 이것과 연결되지 않니?“하셨다. 

이이효재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지역에서 여성들과 함께 지역사회운동을 펼쳤다.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와하하하

순간 선배들 사이에 웃음이 터지는데 세배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나는 의아했다. 왜 웃지? 알고보니 결혼해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느라 공부와 담쌓고 사는 제자들을 선생님은 이렇게 일깨우시는 것이었다. 웃음의 의미는 먼저 겪은 선배들의 ‘너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동병상련!

이름은 세배모임인데 내용은 ‘강의’였다.

“내가 티비에서 보니까 요즘 이런 프로그램이 있더라.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 거야. 이럴 때 우리 여성들은…….”

말씀 도중에 서재에 들어가셔서 책을 꺼내 오신 게 몇 번 이던가. 영어로 된 책을 어떤 제자 앞에 놓으시며 “네가 이것 좀 번역하면 좋겠구나” 미션을 주시기까지, 다양한 지적 자극이 흥미진진하면서 긴장이 감도는 ‘살아있는 강의실’은 아이들이 있었다면 성립될 수 없었다.

1987년 여성민우회의 탄생은 고학력 주부에 머물러 있던 제자들을 세상의 일꾼으로 일으켜 세우고자 하셨던 선생님의 첫 ‘사업’이었고, 1992년 창설된 한국여성사회교육원은 일꾼공급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한 ‘공장’이었다.

ⓒ고 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진해 ‘기적의 도서관’ 유치를 주도해 이 도서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고 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2004년, 팔순의 선생님은 진해 기적의 도서관 ‘자원봉사자’가 되어 계셨다.

“고사리 손들이 책을 들고 도장을 받으러 오는 걸 보면 얼마나 이쁜지 몰라. 이게 한국사회의 희망이다.”

도서관을 유치위원장을 거쳐 운영위원장을 맡으시는 한편 주 2회 도서 반납대에서 확인도장 찍어주는 일을 선생님은 큰 보람으로 기뻐하셨다.

선생님의 아이들 사랑은 지극히 깊었다. 여성들이 성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사회를 실현하는 일에 적극 앞장서서 아이들이 그런 세상에서 살게 하는 것이 진정한 ‘모성’이라고 가르치셨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에 왔던 동네 젊은 엄마들이 이제는 시민의식과 주체의식이 생겨나서 개인의 삶이 달라졌고 가족이 변화하고 가부장적이고 수구적인 이 지역에 새로운 기운이 돌고 있다.”

도서관 운동을 지역여성운동, 민주화 운동으로 진화시키신 것이다. 왜 모두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가. ‘바다는 결국 시냇물이 모여야 이루어진다’ 교수 퇴임 후 고향 진해로 가신 뜻은 ‘풀뿌리 여성운동’을 몸소 구현하고자 하심이었다. 

이화여대 첫 운동권 첫 동아리 ‘새얼’ 학생들과 함께.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이화여대 첫 운동권 첫 동아리 ‘새얼’ 학생들과 함께.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이효재 선생님은 어떤 분인가요?”

1979년,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창비)이라는 책을 읽은 대학 신입생으로서 박정희 정권 말기라는 꽁꽁 얼어붙은 한국사회에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깃발을 우뚝 꽂으신 그분을 물었을 때, 선배들의 대답은 하나였다.

지.행.합.일

아는 만큼 온전히 실천하며 사는 분! 위안부 여성들의 존재를 알고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에 앞장서셨고(1991년 한국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공동대표), 평등을 알기에 여성노동자와 빈민문제에 예민하셨다(1987~1998,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 협의회 이사, 이사장).

20권 가까운 책을 쓰실 만큼 (공저 포함) 시대의 진실을, 사회의 현실을 알기 위해 열심이었던 선생님에게 앎의 핵심은 분단이었다(1985년 『분단시대의 사회학』, 한길사) 

1991년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의 여성 대표로 구성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 모습. 여연구 북한여성대표 단장 등 개최하면서 남북 여성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1991년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의 여성 대표로 구성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 모습. 여연구 북한여성대표 단장 등 개최하면서 남북 여성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고 이이효재 여성장 공동장례추진위원회

 

분단이라는 앎의 실천은 당연히 통일!

“남북이 화합하고 협력하여 평화통일 이룩하자, 나는 매일 100번씩 이 말을 한다. 너희들도 아침에 일어나면 100번씩 해라.”

2020년 97세에 이르도록 매일매일 통일 운동을 펼치신 선생님의 이 말씀은 이제 유언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말로만 외치는 자 많은 세상에서 엄혹한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시고(1982,해직교수협의회 회장, 1988~1994 한겨레 신문 이사) 작은 공로도 내세우려 다투는 시대에 훈장도 마다시고 일체의 언론 노출을 거절하신 채, 오로지 민초들의 대동단결로 평등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일에 학자로서 현장운동가로서 한 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사신 선생님!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이 시대에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다가야 하는지, 큰 그림을 보여주시는 계획, 따르렵니다. 저희에게 주신 마지막 미션, 통일을 이루기까지.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트링크갤러리에서 오한숙희 사단법인 누구나 이사장은 "장애 아이를 가진 가정들을 위해 넓지는 못하지만 작은 곳에서라도 구체적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서 깊이 있게 만들어 보고 싶다"며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오한숙희 사단법인 누구나 이사장   ⓒ홍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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