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③] 김점동, 박에스더가 되다
[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③] 김점동, 박에스더가 되다
  •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
  • 승인 2020.09.27 10:45
  • 수정 2020-09-27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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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6세 김점동.
1893년 16세 김점동.

 

일찍이 1900년 서양의학을 정식으로 공부해 의사자격증을 가지고 현장에서 아픈 사람을 치료한 한국 최초의 의사는 남녀를 막론하고 여의사 김점동(박에스더)이다. 필자는 박에스더로 알려진 김점동의 삶을 통해 그녀가 세례를 통해 선택한 이름 에스더와 함께 사후 100여년이 지난 지금, 부모가 지어준 고유의 성과 이름 김점동도 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화학당, 보구여관(普救女館)과의 인연

김점동은 1877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광산 김씨 김홍택과 연안 이씨의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점동은 아버지 김홍택이 1885년 미국 선교사아펜젤러(H.G. Appenzeller)의 집에서 일하게 된 인연과 여러 집안 사정 등이 겹치며 1886년 5월 문을 연 이화학당의 4번째 학생으로 11월 합류하게 된다. 당시 아펜젤러는 1885년 9월부터 집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고 스크랜튼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시작했으므로 선교사들의 생활을 지켜본 김홍택의 결정은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132년 전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132년 전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김홍택은 딸만 셋 있는 집안에서 넷째 딸이 태어나자, 숙식이 해결되고 교육의 기회가 있는 이화학당에 1886년 11월, 9살 된 셋째딸을 입학시켰다. 김점동의 근대식 교육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점동이 처음 아버지와 함께 스크랜튼 대부인을 만난 날의 일화를 이방원은 저서 ‘박에스더’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김점동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스크랜튼 대부인을 처음 만난 날은 몹시 추웠다. 그녀는 스크랜튼 대부인이 난로 가까이 앉으라고 불렀을 때, 한번도 본 적 없었던 난로 속으로 자신을 집어넣을 것 같아 무서워했다. 서양인에 대한 무서운 소문을 들었을 10살의 점동이는 처음 보는 서양인인 스크랜튼 대부인에 대해,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앞으로의 생활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랜튼 대부인의 친절한 마음을 느끼게 되면서 그녀와 학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이제 김점동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스크랜튼 대부인의 여학교에서 선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게 됐다.”

이화학당에서 함께 생활하는 선교사들은 선생님이자 어머니자, 언니들이며 가족이었을 것이다. 이화학당은 학생들에게 가정이었다. 스크랜튼 선생님 혼자 4명의 학생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초기의 이화학당에서 그들의 하루생활을 머리에 그려보자. 공부하고 놀고, 아마도 어렸으나 자신들이 기거하는 방도 치우고, 자신들을 돌보며 서로를 자매로 아끼며 가정이자 학교로 지냈을 것이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히 안되는 초기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그랬기에 공부하려고, 생존하기 위해 빠르게 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 환경도 되었을 것이다. 1988년에 이르러서는 점점 학생이 많아져서 13명이 되었다.

스크랜튼 부인의 요청으로 미국에서 1887년 10월에는 여성 교육자인 이화학당 제2대 당장 루이자 로드와일러(Louisa Rothweiler, 1853-1921)와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ta Howard, 1862-1930)가 내한했다. 1887년 10월 31일 하워드가 진료를 시작한 이 병원이 바로 이대의료원 전신인 보구녀(여)관(普救女館)이다. 1889년 4월엔 스크랜튼 부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한국인 이경숙이 이화학당에 합류한다. 1890년 10월 여의사 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와 마거릿 벵겔(Margaret Bengel, 1869-?)이 내한한다. 이들과 1892년 부임한 이화학당 제3대 당장 조세핀 페인(Josephine Paine, 1869-1909)들에 의해 이화학당에서는 더 나은 한국인을 만드는 교육이념에 따라 여러 다양한 교육이 시행되었다.

로제타 홀.
로제타 홀.

 

통역과 간단한 치료 보조역할도

점동은 그 시기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상기한 이화학당 교육 선교사들에 의한 교육뿐 아니라 이화학당에서 교육을 도와주던 한국 주재 여선교사들과 선교사 부인들에게서도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김점동은 누구보다도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의 등장으로 획기적인 삶의 전기를 맞는다. 1888년 11월 이화학당 같은 담장 안에 세워진 보구여관에서, 그간 영어가 익숙해진 점동과 몇 친구들은 1890년 10월 24일부터 로제타를 도와 한국 여성들 진료 시, 통역과 간단한 치료 보조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11세의 김점동은 1888년 장마철 어느 날 밤, 천둥 번개의 요란한 빗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다가 하느님께 기도한 후 평화를 얻는 회심의 순간을 경험했고 그 이후 자신의 방에서 작은 기도회를 마련하고 매일 밤 기도회를 열었는데 이 기도회가 바로 한국 여성의 첫 번째 자발적 기도모임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로제타가 서울에 온지 1달이 채 안된 1890년 11월 11일 로제타는 4년 전 화상으로 오른손 손바닥에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이 붙어 있어 치료받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16살 소녀를 수술했다. 3시간 피부이식 과정에서 환자가 자가 피부이식을 거절하자 로제타 자신의 피부를 환자에게 이식하는 것을 본 점동은 “저는 아ㅍㄴㅍㅍㅍ마도 제 친자매거나 선생님이라면 피부를 떼어 줄 수 있겠지만 남이라면 도저히 못해요”라며 몹시 놀라워 했다고 한다. 이후 30여개 피부조각을 이식하는 가운데 이화학당 학생 봉업, 교사 로드와일러와 벵겔 등도 피부를 기증하겠다고 했고 환자의 오빠와 환자도 자가피부이식에 찬동했다. 16세 소녀 환자는 좋은 수술결과와 피부이식으로 회복되었다. 점동은 초기에는 수술을 불편해 했으나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놀랍게 열심히 노력했다고 로제타는 기록하고 있다. 많은 점동에 대한 기록은 로제타 홀 일기에 근거한다.

1891년 신학기 시작 전 겨울방학부터 로제타는 자신을 돕는 김정동과 일본인 소녀 오가와에게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신학기부터는 다른 3학생(봉순, 꽃님이, 여메레)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체계적으로 생리학 수업을 했다고 한다. 동시에 보구여관에서 약을 조제하고 환자 돌보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도하였다. 이 5명의 소녀들을 로제타는 특히 주목하며 아꼈다.

한편 점동은 1888년 하반기에 시작되었던 기도 모임으로 신앙심이 깊어지며 만 13세였던 1891년 1월 25일, 프랭클린 올링거(Franklin Ohlinger) 목사에게 에스더(Esther)라는 세례명을 스스로 선택하여 세례를 받아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정했다. 이때부터 점동은 에스더로 불리웠다. 생활환경 상, 미국 선교사들 틈에서 에스더 이름은 더 자연스럽게 불리웠을 것이다. 에스더는 구약성서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비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구하는 왕비다. 에스더는 ‘별’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이 어린 나이에 점동이 특별한 영적 이름을 선택했음에 주목한다. 일생, 결혼 후에도 계속 가문의 성과 이름을 쓰는 우리나라 문화는 중요하므로 김점동은 존중되어야 마땅하나 이후 기록에는 점동이 선택한 이름 에스더도 존중하려 한다.

로제타 홀의 일기.
로제타 홀의 일기.

 

현재로 보면 중학교 2학년 나이인 14살 되던 해인 1891년 3월 말경부터는 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이미 능숙한 조수 역할을 하였다. 생리학 수업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된다. 오가와가 없을 때도 점동 혼자 약도 조제하고 수술 조수로서도 손색이 없었다고 로제타는 기록하고 있다. 일 예로 생리학 수업을 시작할 때는 뼈를 만지기도 두려워하고 사진도 간신히 볼 정도였던 점동이 신체 외부강의 중 피부가 끝나기도 전에 뼈를 배우고 싶어 했다. 점동은 모든 것을 빨리 배우고 익혔으며 환자들이 오면 로제타가 보기 전에 로제타가 알면 좋을 필수 문진을 마쳤으며, 흔한 병에 대한 로제타의 처방도 모두 익혀 놓았다고 한다. 로제타는 이런 점동을 보며 훌륭한 의사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1891년 3월 29일의 로제타 일기는 점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그리고 그녀가 계속 이 길을 간다면, 적당한 때 미국에 보내 학위를 받게 하는 것도 현명한 처사라 생각된다. 물론 지금 관습으로는 그녀가 외부에서 일을 할 수 없지만, 그냥 이곳 병원 내에 남아 있기만 한다 해도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러면 그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을 훈련시키는 사역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이 일에 관여하셔서 그녀와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

로제타는 1891년 3월과 4월, 총 4건의 구순구개열 수술(언청이 수술)을 했는데, 점동은 수술 보조를 능숙하게 했다. 이 간단한 수술이 여성들의 일생에 엄청난 반전을 가져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목도한 점동은 의사가 하는 일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점동은 반드시 혼자 힘으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은 전한다.

로제타 홀 일기 1891년 8월 15일의 기록에 의하면 로제타가 첫 10개월 간 보구여관에서 치료한 환자수는 2,359명, 82명의 왕진환자가 있었고 35명의 입원환자가 있었다고 한다. 처방전 발행건수가 6,000건이 넘었는데 한국어를 전혀 못했던 로제타 혼자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는 방대한 진료건수에 점동과 소녀들의 조력은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점동의 편지에서 로제타를 선생님으로부터 언니 호칭으로 변화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둘 사이 선생과 제자 사이를 넘어 더 가까운 자매애가 흐르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95년 김점동, 박여선 부부 결혼사진.
1895년 김점동, 박여선 부부 결혼사진.

 

1891년 로제타의 약혼자인 의사 선교사 윌리엄 홀(William J. Hall)이 내한하여 1892년 6월 27일 결혼식을 하고 3개월간 서울에서 윌리엄은 시병원에서, 로제타는 보구여관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생활하다가 윌리엄 홀은 평양으로 의료사역을 하기 위해 출발한다. 1892년 9월 30일 평양에 도착해 의료사역을 하는 동안 로제타는 서울에서 1893년 3월 15일부터 동대문에 진료소를 열고 일주일에 2번씩 진료를 한다. 서울에 다시 온 윌리엄은 로제타와 함께 평양으로 의료선교를 하러 갈 계획을 세운다.

한편 1892년 가을 16세가 된 점동은 집안으로부터 결혼 압력을 받는다. 로제타에게 쓴 점동의 편지를 보면, 어머니가 선교사들이 점동의 신랑감을 찾아주지 않으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남자라도 결혼을 시키겠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점동은 언젠가 미국에 가서 의학을 공부한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터라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로제타에게 어떤 상황이라도 평양이든 어디든 함께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듬해인 1893년 선교사들이 점동의 신랑감을 물색하던 중 윌리엄 홀은 지난해 가을 평양에 가던 길에 고용했던 마부로, 자신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가 된 박여선을 추천했다. 박여선은 윌리엄의 주선으로 학교에 다니며 한글, 한자, 영어 등을 배우면서 선교 사업도 돕고 있었다. 윌리엄이 박여선에게 결혼에 대해 말하면서 신부가 하느님을 충심으로 섬기면서 일하는 여자를 원하는지 자신을 위해 음식과 바느질을 잘하는 여자인지를 물으니 박여선이 하느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여인이 더 좋다고 하는 답변을 듣고 로제타와 의논하여 신랑감으로 추천하기에 이른다. 점동의 어머니는 박여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한다. 점동도 3일간 뜬 눈으로 고민한 끝에 그 당시 관습에 따라 결혼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하고는 결혼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결혼에 임한다.

1893년 5월 5일, 점동은 9살 위의 박여선과 약혼하고 5월 24일 기독교 예식으로 결혼했다. 결혼한 점동은 의학공부도 열심히 하고 환자 진료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다. 쪽진 머리로 오히려 왕진갈 때 자유롭게 되었고, 일반인들로부터도 더 존경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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