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적 가족수당 지급 관행 여전
2005년 폐지된 호주제 잔재...“구한말 회사인 줄”
현행법상 관련 규정 없어 노사 합의로만 결정
인권위가 5년째 시정 권고해도
“노사 합의 못해” 차별 유지하기도
최근 인권위 권고 받은 서울 공기업 3곳 “개선 논의할 것”

가족수당 제도를 성별과 출생 순서에 따라 달리 적용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이라며 5년째 거의 매년 시정 권고했지만 여전한 기업이 많다. ⓒ이세아 기자
가족수당 제도를 성별과 출생 순서에 따라 달리 적용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이라며 5년째 거의 매년 시정 권고했지만 여전한 기업이 많다. ⓒ이세아 기자

 

“장남수당”.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이 자사 가족수당 제도를 부르는 말이다. 배우자나 부모, 조부모 등 부양가족과 사는 직원에게 매달 부양가족 1인당 월 2~4만원을 주는 제도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직원은? 장남이라면 가족수당을 받을 수 있다.

둘째 딸이나 막내 아들이라면? 실질적인 가장이어도 가족수당을 받을 수 없다. 1988년부터 여태껏 바뀌지 않은 규정이다.

불합리한 일이지만, 이처럼 가족수당 제도를 성별과 출생 순서에 따라 달리 적용하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서울시설공단도 부모 등 부양가족과 함께 사는 직원, 떨어져 사는 경우에는 장남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한다. 그나마 서울교통공사는 노동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여 2005년 2월부터 장남만이 아니라 외동딸(“무남독녀”)에게도 가족수당을 지급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구한말 회사인 줄”...호주제가 남긴 ‘장남수당’ 관행
인권위 5년째 “차별” 시정 권고해도 변화 없어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교통공사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만이 아니라 외동딸에게도 가족수당을 지급하나, 여전히 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교통공사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만이 아니라 외동딸에게도 가족수당을 지급하나, 여전히 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주택도시공사 (SH공사)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한다. ⓒSH공사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주택도시공사 (SH공사)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한다. ⓒSH공사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시설공단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한다. ⓒ서울시설공단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2020년 9월 17일 기준 서울시설공단의 가족수당 지급 규정. 부양가족과 떨어져 사는 직원의 경우 장남에게만 가족수당을 지급한다. ⓒ서울시설공단 보수규정 시행 내규 캡처

노동자들은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왔다. SH공사 직원 A씨는 “가족수당 사규는 지금은 삭제된 공무원 수당 규정을 그대로 가져온 케케묵은 규정이다. 직원들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불만이지만 노사 의견이 달라 여태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 직원 B씨는 “무슨 구한말 회사인 줄 알았다”며 “(2019년) 인권위 시정 권고를 받았으나 바뀐 게 없다”고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이라며 최근 SH공사, 서울시설공단 포함 3개 기업에 시정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지난 5년간 해마다 가족수당 차별 관련 진정을 접수했고, 거의 매년 ‘차별’ 결정을 공표했다. 2016년, 2018년, 2019년에 이어 이달 8일에도 결정문을 내놨다.

“사회 변화에 따라 가족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고 장남이 부모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식 또한 크게 낮아졌으며 실제로 부모를 부양하는 실태도 변하였는바, 가족수당 지급 시 딸, 차남 등의 직원을 달리 대우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이는 호주제도가 폐지되고 가족의 기능이나 가족원의 역할분담에 대한 의식이 현저히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남성인 장남을 부양의무자로 보는 호주제도의 잔재로 볼 수 있다.” 8일 인권위가 발표한 가족수당 차등지급 차별 결정문의 요점이다.

 

“노사 합의 못해” 차별적 가족수당 유지하기도
최근 인권위 권고 받은 서울 공기업 3곳 “개선 논의할 것”

노동자들도, 인권위도 수년째 차별적 가족수당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왜 현실은 그대로일까. 가족수당 제도는 현행법이 아닌 노사 간 합의로써 만들고 고치기 때문이다.

헌법 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남녀의 성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한다. 근로기준법 제6조에 따라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 남녀의 성(性)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현행법상 ‘가족수당’에 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앞서 여성신문이 보도한 ‘기업 경조사 차별’과 비슷한 맥락이다. (관련기사▶ “친할머니 5일, 외할머니 2일”… 외할머니 돌아가시면 덜 슬픈가요? www.womennews.co.kr/news/201839)

노사가 만나도 임금, 정규직 전환 등이 먼저 테이블에 오르다 보니, 가족수당 문제는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노사가 합의를 못 봐 개선에 실패한 곳도 있다. 1993년부터 ‘부모와 따로 사는 경우 장남에만 가족수당 지급’ 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경북대병원이다. 병원 측은 2018년 인권위의 ‘성차별 규정 시정’ 권고를 받고 노조와 논의했으나 “부모와 따로 사는 장남에게도 가족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개정안에 노조가 동의하지 않아 개정이 어렵다”며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인권위 권고를 받아들여 차별을 개선한 곳도 있다. 부산교통공사는 2017년부터 장녀에게도 가족수당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 회사 직원이 “여성 차별”이라며 2016년 인권위에 진정했고, 인권위가 그해 7월 “여성 직원에게 남성 직원과 다른 규정을 적용해 불리하게 대우하지 않도록 보수 규정을 개선할 것”을 권고하자 받아들였다.

가족수당 차별 문제를 보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성별이나 출생 순서를 넘어, 혈연가족이 아닌 생활동반자적 관계까지 고려하자는 얘기다. 민법 제974조에 따르면 직계혈족 및 그 배우자 간은 서로 부양의무가 있고, 기타 친족은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에 한해 서로 부양의무가 있다. 그러나 연인·친구 등과 함께 사는 사람, 동성커플 등은 다른 ‘가족’ 구성원을 실질적으로 부양하고 안전망 역할을 하더라도 부양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최근 인권위 시정 권고를 받은 서울 공기업 3곳은 모두 올해 내 가족수당 개선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울교통공사는 여성신문에 “이달 중순 임단협을 열고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시행으로 미뤄졌다. (2019년) 인권위 차별 시정 권고 이후 여러 번 논의했지만 합의는 못했다. 올해 내 임단협에서 다시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설공단도 “올 연말 임단협에서 해당 규정 개선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SH공사도 “차별 요소 없는 합리적 방안을 마련해 곧 노조와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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