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학생들이 한복를 입고 강사 진네트월터에게 체조를 배우는 모습. 사진=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당 학생들이 한복를 입고 강사 진네트월터에게 체조를 배우는 모습. 사진=이화여자대학교

 

대한민국의 근대 여성교육은 서양의학의 도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886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부인은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아들 스크랜튼과 동행한 길이었다. 이화학당에 4번째로 들어온 학생이 훗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사 박에스더가 된 김점동이다.

근대화와 서양의학의 도래, 그리고 여성교육의 시작

우리나라는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격동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화에 들어서게 된다. 서양의학이 중국을 통해 서의학(西醫學)으로 조선에 소개된 것이 18세기 후반이지만, 실제로 의사와 의술, 의료가 들어온 것은 고종 13년(1876)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 이후 일본인들이 부산과 원산, 서울, 인천 등에 서양식 병원을 지으면서부터다. 부산 제생의원(1877), 원산 생생의원(1880), 서울 공사관 의원(1883), 인천 영사관부속병원(1883)을 통해 독일 의학이 간접적으로 전해졌다. 서양의학이 새로운 의료로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고종 21년(1884)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1884.12.4.)이 계기가 되었다.

조선 땅에 최초로 입국한 기독교 선교사인 호레이스 알렌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인 동시에 주한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였다. 그는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극진히 치료해 회복되게 한다. 고종비 민씨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놓은 덕분에 알렌은 1885년 4월 10일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홍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바꾸어 개원한다. 광혜원(廣惠院: 은혜를 널리 베푼다는 뜻)이라는 이름은 2주 후 제중원(濟衆院)이라고 개칭하였다.

알렌과 여성 교육이 무슨 관계일까? 광혜원이 문 연지 한 달도 안된 1885년 5월 3일 감리교 선교사로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이 조선에 도착했다.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을 모시고 가족이 온 길이었다. 스크랜튼은 입국 직후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일하다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John Heron)이 들어오자 황화방의 자기 집에 새로 서양식 병원을 차린다. 그것이 1885년 9월 10일이다.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예배당 자리였다. 이듬해 6월 15일 이 병원은 고종황제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는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병원이라는 의미다. 어머니 스크랜튼 대부인이 문 연 학교도 1887년 2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과 현판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아들은 병원을 세우고 어머니는 여성 교육 기관을 세웠다. 1886년 5월 첫 학생을 받은 뒤 그해 11월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으로 들어온 여자 아이가 김점동이다. 김점동이 어떤 교육과 삶의 여정을 거쳐 박에스더가 되었는지는 정말 위대한 역사 드라마 그 자체다. 다음 주 자세한 내용을 쓰기로 한다.

조선의 근대화와 서양의학, 여성 교육의 접점은 이후 더욱 확대된다. 제중원에 점점 더 많은 환자들이 몰려들면서 알렌은 미국 북장로교 교단에 여의사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그 부름에 응한 사람이 조선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 애니 엘러스(Annie Ellers)다. 일리노이주 출신인 그는 1886년 7월 4일 조선에 도착했다. 장로교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일리노이주 록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의대를 수료한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이란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당장 여의사가 필요하다는 북장로교 선교부의 제안을 받고 2년만 근무하는 조건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제중원에는 바로 부녀과가 신설되었고, 그는 명성 황후의 시의가 되어 처음으로 왕비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진찰한 의사가 되었다. 1888년 왕후를 치료한 공로로 정2품인 정경부인에 제수되었다. 그는 조선에 온 후 선교사 벙커와 결혼했다. 1888년 3월 12일 자신의 집에서 15세의 학생 두 명으로 ‘정동여학당’이라는 여학교를 개교했다. 정동여학당은 정신(貞信)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매일 이들을 가르쳤다 한다. 제중원의 의료 사역을 후임인 릴리아스 호튼에게 인계하고 정동여학교 운영에 헌신했다. 그는 또 YWCA 창설에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1886년의 의사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스크랜튼 대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과 1887년 엘러스 의료선교사가 설립한 ‘정동여학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외법에 의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여성의 활동 범위가 가정 내에 한정되어 있다가 여성들에게 밖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은 여성들이 졸업 후 처음으로 전문직에 진출하게 되고 점차적으로 여성교육기관이 확대되면서 여성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성교육의 시작은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였고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기회와 전문직에 뛰어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가부장적 굴레에 얽매어 있던 여성들에게 주체의식을 심어주고 여성지위를 높이는 사회적 변화를 서서히 일으키게 되었다.

서양선교사들의 여성 교육기관 설립 이후 1898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여권통문)으로 이어지고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도 결성되는 등 점차 여성들이 직접 사회변화를 선도하고 계몽해 나갔다. 이후 특히 전문직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한 구국운동에 앞장서며 사회지도층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성교육의 확산과 함께 많은 여성들이 사회계몽운동, 농촌운동,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한국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의 사회적 참여는 여성 교육 필요성 고취와 함께 서서히 의식이 깨어나고, 여성노동력 수요가 생기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세계적 여성해방운동도 여성의 교육과 의식 확대, 사회적 활동에 영향을 주었다. 개화기 개명된 지식인들뿐 아니라 여성단체에서도 여성의 사회경제활동 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 시기 특히 교육계와 의료계에서 활동한 여성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오늘의 한국여성 교육 상황

2020년, 오늘의 한국여성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중요 척도 중 교육, 노동, 정치참여 세 가지만 살펴보자. 올해 2020년부터는 양성평등주간이 9월 1일부터 일주일간 시작되므로 이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은 매년 9월 1일 발표될 것이다. 그러나 올해 발표된 여성 관련 통계자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018년까지의 자료보다도 더, 놀랍게 부실하였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통계청 원자료와 2019년 발표자료 극히 일부, 2018년 자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를 참고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교육 척도를 살펴보자. 긴 세월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는 여성고등교육의 변천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2005년 여학생 대학교 진학률이 남학생 대학진학률을 0.4%p 추월한 이래 여대생들 약진은 놀랍다. 가장 최근의 공식통계자료인 2018년 여학생 대학진학률은 73.8%로 남학생(65.9%)보다 7.9%p 높다. 16년간 점점 격차가 늘어나며 계속되었으니 분명 35세 미만 여성들은 남성보다 고등교육을 분명 더 받았다. 어린 시절 가정에서 불평등 경험을 겪지 않은 당당한 딸들의 약진에 주목한다. 저출산 시대 능력 많은 고학력 여성들의 약진에 이 사회가 시급히 준비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앞으로 더욱 더 빛을 발할 것이며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회진출과 직업전선에서는 다르다. 여성 고용률이 조금씩 증가하나, 2018년 통계에 의하면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90%가 넘는데 2019년 실제 여성 고용률은 51.6%다. 남성 고용률 70.7%에 비하면 차이는 19.1%p다. 여성 월평균 임금은 남성 임금의 69.4% 수준으로 남녀 동일임금은 아직 요원하다. 통계가 말해주듯 사회는 여성에게 철저히 냉담하다.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성들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투표율: 75.8%)에서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투표율(76.4%)이 남성(74.8%)보다 높았다. 여성대통령 탄생에 대한 여성의 열망이 높았다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2014년 지방자치선거에서는 남녀 투표율이 57.2%로 같았으나.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투표율: 58.0%)에서는 남(58.8%)>여(57.4%)였고,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투표율: 77.2%)때 다시 여성 투표율(77.3%)이 남성(76.2%)보다 높았다. 2018년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전체적으로 60.2%이고 여성은 61.2%이고 남성은 59.9 %였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전체 투표율이 66.2%였다.(부정선거관련 법정공방으로 아직 성별 분류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여성 선거참여율의 추이는 물론 우리 사회의 여성의 삶의 변화를 잘 분석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현상이 보인다. 미래예측도 가능하다.

여성관리자 비율이 미미한 것은 물론이고 선거참여는 높으나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대의정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국회 및 지방의회 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중 여성 비율은 약간씩 증가추세이긴 하지만 30%도 크게 못 미치고 남녀 동수로 가는 길은 역시 멀다. 2017년 드디어 행정부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 비율이 처음으로 50%를 넘었으며, 2018년 여성 법조인은 26.1%, 의료 분야의 여성 비율(의사 25.4%, 치과의사 27.0%, 한의사 21.0%, 약사 64.0%) 도 꾸준히 증가추세다. 아직 멀었지만 여성이 약진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여성권리 획득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많은 선각자들의 각성과 희생적 노력의 토대가 있다. 지난 호에 지적했듯이 1900년 첫 의사 김점동 이후, 대한민국 전체 의사는 2020년 현재 129,334명, 여의사 34,316명으로 26.5%에 달한다(2020년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 보건복지부의 통계는 아직 2018년까지의 숫자만이 공식발표되었다). 현 의대생 약 40%가 여학생이니 앞으로 더 많은 알파걸 여의사들이 등장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여성은 1886년 여성근대교육이 시작되고 1898년, 여권통문, 여성권리선언을 하며 교육권을 달라고 외치던 시기에서 약 1세기 만에 교육에서 남성을 추월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각 분야 여성의 약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미래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꽉찬 내용으로 충실하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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