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속 일과 돌봄 모두 떠안아
“업무 효율도 논문 발표·네트워킹 기회도 ↓”
워킹맘은 경력 단절 걱정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 걱정
과학저널 ‘네이처’ 최근 분석
“코로나19 속 여성들, 남성들보다 커리어 뒤처져”

“2월 23일 일요일 저녁 문자가 왔다. 당장 다음 날인 월요일 24일부터 어린이집 휴원을 알리는 문자였다. 아 올 게 왔구나. 나에게 코로나19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과학기술학자 임소연 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의 이야기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지자, 그는 아이와 함께 2월 말부터 세 달가량 충남 서산의 본가에서 지냈다. 남편과 달리 재택근무를 할 수 있고, 친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매일 카페로 출근해 강의 준비 등 업무를 했고, 저녁에 귀가해 아이를 돌보고 씻기고 재웠다. 지속가능한 생활은 아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원격수업을 잘 따라가려면 양육자가 자료 준비부터 결과물 업로드까지 아이 곁에서 하나하나 챙겨야 하는데, 임 연구교수의 일정상 무리였다. 갑자기 육아와 돌봄을 떠안게 된 임 연구교수의 어머니도 지쳐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후 아이를 어린이집 긴급돌봄반에 보내고야 한숨을 돌렸다.
요즘 임 연구교수는 예전처럼 집과 연구소를 오가며 강의, 포럼, 학회, 매체 기고 등 활동 중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는 한 이 평화가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일하는 동안 아이를 봐줄 곳이 있느냐 없느냐가 그의 “정상 생활 가능 여부를 좌우한다”. “솔직히 일하다 보면 아이가 어떤 수업이나 케어를 받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아이들이 방역 지침에 따라 생활하기만 한다면 앉혀놓고 밥만 줘도 감사한 입장이죠.”
코로나19 위기는 과학기술 현장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재택근무나 스마트 워크가 비교적 수월할 테니 커리어 개발에 큰 지장이 없지 않겠냐는 예상은 빗나갔다. 많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은 ‘돌봄 공백’ 속 양육·가사 등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여자가 있을 곳은 집’이라는 해묵은 성 역할 관념, 의사결정권자 대부분이 남성인 과학기술계의 남성 중심적 문화는 이러한 현상을 더 부채질하고 있다. 연구소와 대학들이 문을 닫거나 출입을 제한하면서 연구 실적을 내야 하는 학생과 연구자들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적지 않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경력 단절과 고용 불안을 걱정하고 있었다.

남성중심 학계 속 여성 배제 여전한데
코로나19 속 일과 돌봄 모두 떠안은 여성들
워킹맘은 경력 단절 걱정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 걱정
과학저널 ‘네이처’ 최근 분석
“코로나19 속 돌봄 도맡은 여성들, 남성들보다 커리어 뒤처져”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여성과총) 회원들이 지난 4월 연재한 ‘뉴노멀 : 코로나19 시대의 여성과학자’ 칼럼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한다. 이 칼럼을 기획한 미생물학자 문성실 박사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 여성 과학기술인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일하는 문 박사의 상황도 다른 여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올 초부터 두 아이는 온라인 등교를 했다. 학습자료 인쇄, 스캔·제출부터 숙제 점검까지 “완전히 엄마 일”이었다. 한창 화상회의 중에 아이가 교사와 영상통화 중 문제가 생겨 급히 나가서 도와야 하는 때도 있었다. 교사와 매번 소통하려니 감정노동이 늘었고, 집에서 오래 부대끼다 보니 가족끼리 다투기도 했다. 고민 끝에 아이들은 학교 수업 대신 홈스쿨링으로 전환했다. 문 박사는 일주일에 2~3회만 실험실에 나가고 재택근무 중이다.
“팬데믹 이후로 제가 느끼는 가장 큰 문제는 일하는 속도가 느려졌다는 거예요. 상사가 요구하는 속도를 못 따라가요. 이렇게 천천히 가도 괜찮나 싶기도 해요. 저만 그런 게 아니예요. 일과 돌봄 모두를 맡게 된 여성들의 삶은 느려졌고, 연구비 수주와 논문 발표 기회는 물론 과학계의 ‘이너 서클’에 들어갈 기회도 줄어들고 있어요.”

지난 5월 20일 과학저널 ‘네이처’지에는 “코로나19로 여성의 돌봄노동이 늘면서 여성들은 남성 동료들보다 커리어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분석이 실렸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생태학자 메간 프레더릭슨 박사는 코로나19가 여성 과학자들의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과학자들이 발표 전 논문을 투고하는 아카이브 서버에 올라온 논문 3만6529편을 분석했다. 또 저자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 사회보장국의 성별에 따른 이름을 확인했다. 분석 결과,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봉쇄조치를 실시한 3~4월간 아카이브에 올라온 논문의 첫 번째 저자 중 여성은 2.4%, 남성이 6.4% 늘었다. 생명과학 분야 논문이 올라오는 바이오아카이브의 경우 여성이 24.2%, 남성이 26% 더 논문을 많이 투고했다. “작지만 분명한 차이”라고 프레더릭슨 박사는 설명했다. 미국 인디애나대 블루밍턴의 연구진이 분석한 결과도 비슷했다.
문 박사는 “전 세계적으로 과학계의 유리천장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규직은 그래도 덜 불안하지만 포닥(postdoc)들은 계약 기간 안에 뭐든 해야 하니까, 재택근무하래도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출근하더라고요.”
앞으로 학계에 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여성들도 있다. 화학과 과학기술학 석사를 받고 이공계와 인문학을 아우르는 연구를 해온 김연화 연구자는 “육아 때문에 제 일을 못 하는 게 너무 답답해서 화도 내고 고민했는데 답을 못 찾겠다”고 말했다. “어린이집이 긴급돌봄으로 바뀐 이후로는 새로 입소하기가 쉽지 않아요. 위험해도 가끔 아기를 데리고 연구실에 가요. 남편 연구실이라서 가능한 거죠. 제가 일정이 있을 때는 남편이 애를 보고요.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지만요.”
임 연구교수는 “여성, 특히 엄마라는 이유로 학계에서 은근히 배제되는 현실은 여전한데 코로나19 때문에 여성들이 활약할 기회조차 없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코로나19를 떠나 육아는 항상 제 커리어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어요.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고 연구할 시간이 늘어난 건 아니에요. 아이 옆에서 컴퓨터를 켜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고요. 온라인 학회 참여도 힘들어요. 외국에 5박 6일 나가면 모를까, 남편한테 ‘나 오늘 줌(Zoom) 해야 하니까 애는 니가 봐’라고 말하자니 눈치 보여요.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학문 공동체 내에서 인맥을 넓히고 제 입지를 늘리기가 쉽지는 않네요.”
문 박사는 “팬데믹으로 바뀐 여성들의 생애주기에 대한 이해와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직접적인 돌봄 지원도 필요하지만, 경제적 지원도 중요해요. 8시간 근무하던 사람이 가족을 돌봐야 해서 4시간만 일할 수밖에 없게 되면? 해고하는 게 아니라 직업의 안정성을 유지해줘야죠. 연구와 논문 일정을 연장하고, 비용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면 좋겠어요.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출산·육아를 하면서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그간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잖아요. 코로나19로 이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 돼선 안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