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입법 논의 자꾸 미뤄져
21대 국회 ‘낙태죄’ 관련 법안 발의 0건
미프진 등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하려면
모자보건법 개정 등 시급하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조용...“논의중”

법무부 자문기구 “낙태죄 전면 폐지” 권고
시민사회단체 “환영...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 넘어
성·재생산 건강권 보장 법제화 시급”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인 9월 27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우리의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인 지난해 9월 27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우리의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관련기사 ▶ ‘낙태죄 헌법불합치’ 후 임신중지 수술 의사 무죄판결 이어져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037)

 

헌재 결정에 따라 국회는 오는 12월 31일까지 형법과 모자보건법상 ‘낙태죄’ 처벌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이후 ‘낙태죄’는 효력을 잃는다. 큰 사회적 갈등을 부른 문제인 만큼, 혼란을 줄일 방법을 모색하고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다질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약 4개월 남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입법 논의는 다른 현안에 밀려 자꾸 미뤄지고 있다. 21대 국회 들어 발의된 낙태죄 관련 법안은 0건이다.

그간 시민사회단체들은 단순히 ‘낙태죄 폐지’를 넘어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행사될 수 있는 ‘성·재생산 권리보장법’ 제정을 요구해왔다. 임신중지한 여성은 형법상 범죄자가 되고, 사회적으로는 ‘살인자’.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히기 일쑤다. 임신중지 수술은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데다 ‘부르는 게 값’이라 여성들은 수백만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기회나 선택권도 없이 의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임신중지가 여성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기존 임신중절 수술 방식이 적절한 의료 행위인지, 프랑스처럼 한국도 국가가 임신중지 건강보험 적용을 해야 하는지 등을 검토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반복됐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은 지난 6월 21대 국회에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공공의료 확대, 성·재생산 권리 보장을 촉구했다. 모낙폐는 성명을 통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국민은 스스로 삶을 존엄하게 결정할 헌법상의 권리가 있으며, 특히 임신·출산이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여성의 임신중지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이제 온전하게 법·제도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1일, 법무부의 정책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정책위)는 임신주수와 관계없이 ‘낙태죄’ 처벌을 폐지하는 법 개정을 권고했다. 형법 제27장(낙태의 죄)을 없애고, 여성의 동의 없이 임신중지하게 하거나 이를 통해 여성을 상해에 이르게 한 사람을 처벌하는 ‘부동의 낙태죄’를 만들고, 이는 상해죄·폭행죄로 다루자는 내용이다. 임신중지를 불법/합법으로 구분하고 특정 조건 하에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식보다 진일보한 권고다.

특히 “낙태죄 폐지 이후 낙태에 대한 완전 비범죄화와 평등·건강·안전·행복하게 여성이 임신·임신 중단·출산할 수 있는 권리 보장과 실질적인 생명보호로 법·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권고한 대목이 눈에 띈다. UN 시민적·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위원회 등 국제기구가 한국 정부에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를 권고한 것과도 맞닿아 있다. WHO의 인공임신중절 가이드라인(2015)은 “인공임신중절과 관련된 법과 정책은 여성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안전한 임신중절을 시기적절하게 받는 것을 방해하는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장벽을 철폐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무부는 정부 공식 입장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으나, 여성계와 의료계에서는 환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달 21일 성명을 내고 “‘처벌과 통제’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 보장’ 관점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도 지난달 25일 환영 성명을 내고 “이제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넘어 재생산 건강을 보장하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프진 등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하고
여성의 경험·특성 연구해 의료제도에 반영·개편해야
모자보건법 개정 등 시급하나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조용...“논의중”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인 지난해 9월 27일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앞에서 우리의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와 관련해 모자보건법 개정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는 지난달 24일 성명을 통해 보건복지부에 임신중지 의약품(미프진) 도입과 이를 위한 모자보건법 개정을 요구했다. 건약은 “모자보건법이 임신중지 방법을 수술로 제한하고 있”으며, “낙태죄가 폐지되도 모자보건법 개정 없이는 임신중지 의약품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제 어떤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여성이 처한 다양한 사회경제문화적 맥락과 여성의 경험을 반영한 의료서비스, 여성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하는 의료서비스가 필요하다. 국가 차원의 깊이 있는 연구와 데이터 축적을 통해 여성의 경험과 특성을 고려한 제도를 설계할 때”라고 말했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의 허용 사유와 방법 등을 규정한 모자보건법의 주무 부처이자, 병·의원 관리 감독도 맡고 있다. 하지만 최근 보건복지부의 행보를 보면 주무 부처의 존재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2018년 ‘낙태죄’ 위헌 소송 당시 헌재가 관련 부처 의견을 요청하자, 보건복지부는 ‘의견 없음’을 내놓아 질타를 받았다. 2020년도 보건복지부 업무계획에서도 임신중지나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 관련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임신중지·모자보건법 관련 업무는 인구정책실 산하 ‘출산정책과’에서 전담하고 있다. 지난해 신설된 양성평등담당정책관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보건복지부가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을 위한 방향으로 법·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이어지는 이유다.

담당 부서인 출산정책과의 손문금 과장은 “법무부, 여가부 등 관련 부처는 물론 내부 부서들과도 모자보건법 개정 방향을 논의해왔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직 밝히기 어렵다”고만 말했다. 임신중지 약물 도입을 위해 모자보건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관련 의견을 파악하고 있으며 내부 논의 중”이라고 했다. 임신중지가 여성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거나,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계획이 있는지 묻자, 역시 “여성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상담을 원하는지는 살펴봤으며, 관련 부서와 개선방안을 논의 중이다”라고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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