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 폐지 15년...여전한 경조사 ‘외가 차별’
노동자들 “후진적 행태...사라져야”
현행법상 관련 규정 없어 노사 합의로만 결정
‘경조사 외가 차별금지’ 고용평등법 개정 움직임도
동거·비혼·1인가구·입양·반려동물 등
다양한 ‘가족’ 위한 복리후생 제도 필요

ⓒ 이세아 기자
어머니 쪽이든 아버지 쪽이든 가족을 잃은 슬픔은 다르지 않건만, 일부 기업의 ‘경조사 외가 차별’ 관행은 여전하다. ⓒ 이세아 기자

 

서울교통공사는 임직원의 외조부모상(喪)에는 근조화환을 보내지 않는다. 친조부모를 잃은 임직원에게만 화환을 지급한다. 현대자동차는 친조부모상의 경우 휴가 5일과 조사용품을 지원하는데, 외조부모상에는 이틀만 휴가를 준다. 본인 조부모의 탈상휴가도 친가에는 하루를 주지만, 외가에는 따로 휴가를 주지 않는다. 순천향대서울병원은 친조부모상에는 조의금 10만원을 지급하나, 외조부모상에는 조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

LG CNS는 임직원의 백숙부모상, 즉 아버지의 남자형제와 그 배우자의 상에 휴가를 지급한다. 그런데 고모, 이모 등 “여자 형제는 해당 안 됨”이라고 못박았다.

어머니 쪽이든 아버지 쪽이든 가족을 잃은 슬픔은 다르지 않건만, 일부 국내 기업들은 부의금·휴가·화환 지급제도를 외가에만 다르게 적용하고 있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됐고, 국가인권위원회도 2013년 “친조부모상과 외조부모상을 당한 직원에게 휴가·경조비를 달리 지급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지만, 아직도 달라지지 않은 기업들이 있다.

 

호주제가 남긴 ‘경조사 외가 차별’ 관행
노동자들 “후진적 행태...사라져야”

기업의 ‘경조사 외가 차별’ 관행은 부계(父系)에만 가족 구성원에 관한 법적 책임이나 권한을 부여하는 호주제의 잔재다. 친조부모가 돌아가신 경우 임직원이 상주를 맡을 수 있고, 외조부모가 돌아가신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부의금·휴가·화환 지급 규정을 다르게 적용해왔다. 2013년 인권위 조사 결과를 보면, 62개 그룹 대표 계열사와 중견기업 중 ‘외조부모 경조사 휴가·부의금 차별’ 기업이 41곳이나 됐다. 지난해 시사저널이 조사한 '10대 그룹 상조복지 현황'(2018년 매출액 기준 상위 10위)을 보면, 9곳 중 5곳이 친가보다 외가에 불리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1곳 미응답).

경조사 제도는 현행법상 관련 규정이 없어서 단체협약 등 노사 합의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임금, 정규직 전환 등이 단체교섭 테이블에 먼저 오르다 보니, 경조휴가 문제는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여성신문이 만난 노동자들은 이러한 관행이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후진적인 행태”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케케묵은 관습”이라고 비판했다. 대기업 노동자 A씨는 “사내 여직원들끼리는 ‘경조사 외가 차별’에 불만을 갖고 비판하는 분위기지만, 남초 조직이다 보니 상부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도 “남성 비중이 높은 대기업이나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이런 게 차별이라는 문제의식이 부족하고, 논의가 이뤄져도 내부 저항이 크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관련 규정 없어 노사 합의로만 결정
‘경조사 외가 차별금지’ 고용평등법 개정 움직임도

지난 7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조사 휴가 시 친가·외가 차별 금지 등을 골자로 한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원문 캡처
지난 7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조사 휴가 시 친가·외가 차별 금지 등을 골자로 한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원문 캡처

헌법 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에서 남녀의 성을 근거로 차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한다. 근로기준법 제6조에 따라 사용자는 근로자에 대해 남녀의 성(性)을 이유로 차별적 대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현행법상 ‘본인이나 가족의 경조사를 위한 휴가’에 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은 “평등한 경조사 휴가를 법률로써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중소기업 노동자 B씨는 “사측이 외가 경조사 지원을 거부하거나 차별 적용해도 항의할 법적 근거가 없다. 근로기준법이나 고용평등법에 근거 조항이 있다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도 “노사 협의 시 지침이 되는 근거법안이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진경 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도 “현장의 관행도 법에 기반해 만들어진다. (경조사 휴가 차별 금지) 법이 있으면 논의가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관련 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7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대 국회에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근로자가 경조사 휴가를 신청하는 경우 이를 허용하도록 하고, 친족의 사망에 따른 경조사 휴가 시 사망한 사람의 성별이나 친가·외가 여부에 따라 휴가 기간을 다르게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사업주에게 벌칙이나 과태료를 부과”하는 게 골자다.

한편 “기업의 경조사 휴가 문제는 법적 규제보다 노사 합의를 거쳐 자체적으로 개선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2018년 유민호 국회입법조사관은 인권위도 동일한 취지로 ‘권고’가 아닌 ‘의견표명’을 결정했음을 지적했다. 유 조사관은 “우리나라의 저조한 연차휴가 사용률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특별휴가를 도입할 필요성은 다소 부족”하고, “추가 법정 휴가를 신설하면 기업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도 밝혔다.
 

동거·비혼·1인가구·입양·반려동물 등
다양한 ‘가족’ 위한 복리후생 제도 필요

20일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열린 ‘복지제도, 이의있습니다’ 수다회에서 여성들이 비혼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판넬에 쓰고 있다.
지난해 6월 20일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열린 ‘복지제도, 이의있습니다’ 수다회에서 여성들이 비혼 여성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판넬에 쓰고 있다. ⓒ 김서현 기자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내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갑작스러운 이별로 우울증과 슬픔을 지속해서 겪는 ‘펫로스 증후군’을 앓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 내 반려동물입양센터에서 관계자가 유기견을 돌보고 있는 모습.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내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갑작스러운 이별로 우울증과 슬픔을 지속해서 겪는 ‘펫로스 증후군’을 앓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진은 경기도 과천시 서울대공원 내 반려동물입양센터에서 관계자가 유기견을 돌보고 있는 모습. ⓒ이정실 사진기자

노동자들이 말하는 기업 경조사 제도의 문제는 ‘외가 차별’만이 아니다. 가족 개념이 빠르게 변하는 요즘, 친족 촌수 중심의 제도와 현실의 괴리는 커져만 간다. 혼인과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관계, 이를테면 동거나 사실혼 관계의 커플, 친구나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족’이나 1인가구는? 이들도 노동자로서 필요한 경조사 지원을 누려야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배 대표는 “결혼휴가가 직장인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긴 휴가라는데, 비혼 직장인들은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 이혼한 직장인들은 어떤가. 이혼 과정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생각하면 휴가 등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반려동물은 어떤가. 현행법상 혈연·이성애 중심적인 ‘가족’ 개념을 넘어 폭넓은 가족의 범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업 경조사나 복리후생 제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차별을 개선한 사례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은 친가, 외가 조부모상 모두 3~5일간 휴가와 조의금, 화환 등을 지원한다. LG CNS도 지난해부터 외조부모상에도 친조부모상과 동일하게 3일 휴가, 조의금, 화환 등을 지원한다.

서울교통공사는 폭넓은 가족 개념을 고려해 곧 경조사 제도를 개선할 계획이라고 27일 밝혔다. 공사 사내근로복지기금 관계자는 여성신문에 “조부모상 화환은 친가, 외가 구분 없이 동등하게 지급하고, 기존 출산축하금 지급제도를 개선해 아이를 입양한 임직원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사회 변화에 맞춰 포괄적으로 제도 개선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노동단체들도 자체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활동가와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동성 포함) 경조사 휴가를 지원한다. 민주노총 사무총국은 경조사 지원 시 노동자 본인과 그 배우자를 따로 구분해온 관행을 깨고 평등하게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