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속 여성] 베이징행동강령 채택 25주년 ‘여성 연대’
[세계 속 여성] 베이징행동강령 채택 25주년 ‘여성 연대’
  • 장은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장
  • 승인 2020.08.30 10:34
  • 수정 2020-08-30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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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중국 베이징서 울려 퍼진
‘여성 권리 대장전’ 선언
25년 지난 현재 구조적 차별·
디지털성폭력·팬데믹·기후변화
등 새로운 도전에 직면
ⒸUN Women
베이징행동강령이 채택된 지 25주년이 되는 올해 8월 국제기구, 정부, 시민단체,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25년 전 베이징의 약속을 재점검하는 ‘세대평등포럼(Generation Equality Forum)’을 열 예정이었으나 내년으로 미뤄졌다. ⒸUN Women

 

2001년 1월 뉴욕의 강바람은 매서웠다. 당시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의 위원이셨던 신혜수 박사의 제안으로 해당 위원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더 많은 한국의 청년들이 국제회의에 와서 배워야 한다며, 별다른 업무도 주시지 않고 회의에만 열심히 참석할 것을 권유하셨다. 당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나는 이때 처음으로 국제 여성 인권 의제를 접하게 되었다. 솔직히 회의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유엔본부가 위치한 뉴욕 이스트 강변에서 불던 겨울 칼바람이 무척 매서웠다는 점과 ‘베이징행동강령’, ‘성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여성차별철폐협약’의 세 단어만 기억에 남았다.

이후 내가 다시 베이징행동강령을 접한 것은 현재 직장에 입사한 후이다. 베이징행동강령에 대해 조사를 해야 했는데, 한 번도 원문을 직접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200페이지에 육박하는 번역본을 인쇄하여 작정하고 정독하였다.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행동강령의 12개 우선 분야는 여성의 삶의 전 영역을 다루고 있었고, 각 조항은 매우 세부적인 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1995년 시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었으며,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여성과 환경, 여성과 분쟁 분야가 이미 당시에 우선 분야로 채택된 예지력에 놀랐다. ‘여성 권리 대장전’이라는 별명이 달리 나온 게 아니었다. 

1995년 북경여성대회
1995년 북경여성대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이 문서는 열정과 결기로 가득했다. “양도할 수 없고, 완전하며, 불가분한 모든 인권의 한 부분으로서의 여성과 여아의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에 대한 완전한 이행을 도모한다”라는 부분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했다. 행동강령을 작성한 선각자들의 비장한 각오에서는 모종의 영성마저 느껴졌다. ‘아,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자유와 권리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구나. 저들의 수고와 헌신 위에 내가 서 있구나. 언젠가는 나도 이것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하겠구나.’

베이징행동강령이 채택된 지 25주년이 되는 2020년은 원래 전 세계 차원의 성평등 이행을 가속화하기 위한 기념비적인 해가 될 예정이었다. 국제기구, 정부, 시민단체,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25년 전 베이징의 약속을 재점검하고 “성평등을 향한 즉각적이고도 불가역적(immediate and irreversible)인 진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야심차고, 변혁적인 활동을 시작”하고자 올해 8월에 ‘세대평등포럼(Generation Equality Forum)’을 개최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 ‘세대평등포럼’은 그 제목이 말해주 듯 전 세계 청년의 참여와 리더십을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향후 성평등 의제 수립과 이행은 청년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 아래, 포럼의 행사와 활동은 청년들을 목소리를 포함하였고, 가상공간, SNS 활용 등을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하고 논의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1995년 9월 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여성회의에서 한국 대표로 기조 연설을 하는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국가기록원
1995년 9월 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여성회의에서 한국 대표로 기조 연설을 하는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 ⓒ국가기록원

 

25년 전 수립된 베이징행동강령이 무색하게, 아직도 전 세계 여성들은 구조적인 차별과 디지털 성폭력, 팬더믹, 기후변화와 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기로에서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함께 미래의 페미니스트 의제를 수립하는 작업은 정말 필요하고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원대한 계획은 코로나로 인해 멈춰 버렸다. 모든 준비 작업과 포럼 개최는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잠시 멈춘 시점에서 현재 한국의 성평등 어젠다를 견인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차별과 폭력에 용기를 낼수록 백래시(backlash·반격)와 위협에 좌절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1995년도의 베이징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국내에서의 길이 막힐 때 때로는 해외와의 연대가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청년 여성들이 시간을 내어 베이징행동강령을 정독하기를 권한다. 잠시 멈춘 이 시간이 베이징의 정신에 대해 생각해보고 논의하는 기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한국의 청년들도 내년에 열릴 세대평등포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로써 전 세계의 청년들과 탄탄한 연대를 이루어 가길 기대한다.

이 길을 먼저 가셨던 분의 사명감이 현재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 20년 전 겨울 뉴욕 이스트강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배웠던 베이징의 정신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수할 것인지 더 고민해야 하는 2020년 여름의 끝자락이다. 

장은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장
장은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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