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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다. 느이들이, 그리고 내가

한번 터진 봇물은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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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세상의 모든 영화와 소설이 내 이야기 같더니 이제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마음의 틈새를 보고, 메우고, 결국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가 영화의 변치 않는 주제였던 시절, 내 삶의 주제도 그것이었던 시절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머리칼이 희끗해지고 보니 도무지 청춘남녀들의 실랑이와 눈물은 내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싱글즈>를 보고도, 참 영화 괜찮네, 요즘 애들은 참으로 똑똑하군, 하며 흘려버리고 말았을까. 내가 이제 세월을 거꾸로 돌려 머리털이 다시 검어질 일이 있겠는가. 새삼 결혼을 이 놈이랑 해야할지 저 놈이랑 해야할지 고민할 건덕지가 있겠는가. 그러면 내가 바로 내 이야기라고 볼 영화가 뭐겠냐고? 소위 여성이 자기를 주체적으로 찾아가는 여성영화? 소위 불륜영화?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호우경보가 내린 여름의 막바지에 영화를 하나 보았다. 보고 싶은 영화는 바로 옆 상영관에서 하는 <스위밍 풀>이었지만 이러구러 하여, 여차저차하여 <바람난 가족>을 보게 된 것. 사실 그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았다.

햇볕이 뜨겁던 어느 한 낮, 우연히 마신 낮술 한 잔에 얼굴이 붉어져 택시를 타고 일터로 들어가던 중에 옆으로 지나가는 버스 정 중앙에 바람난 가족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남편 오기 전에 한 번 보죠?” 하는 카피를 보곤 으이구. 지겨워라. 야릇한 눈빛, 아니 뭔가 갈망하는 눈빛에 가랑이를 벌리고 앉은 배우의 모습과 그 글귀가 지겨워서 눈을 놀리고야 말았었으니까. 더 지긋지긋한 것은 때 맞춰 쏟아지기 시작한 그 영화에 대한 진지한 평들, “단순한 떡 영화가 아니다” “부계가족의 멸망” “진정한 여성영화일 수도” 같은 것들이었다. '떡'치는 영화로 홍보해놓고, 기실은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가족에 대한, 개인주의에 대한 진정한 해부라고? 심사는 완전히 뒤틀어졌으나 세상일은 늘 그렇게 가려던 길로 가지는 않는 법. 궁시렁 궁시렁거리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멀리로는 20년 전(맞나?) <파리 텍사스>의 황량한 풍경에 엉엉 울던 이후, 가까이로는 십 년 전(이것도 맞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알코올 중독자와 매춘 여자와의 이야기를 보며 통곡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나는 영화를 보며 꺼이꺼이 울고야 말았다.

호정(문소리 분)이 자전거를 타고 언덕배기를 내려오고 올라가고 하는 별 비범하지도 않은 장면에서 공연히 마음이 흔들흔들 하는 통에 이게 웬일인가? 싶다가 호정에게 관심 있는 고등학생이 불량 청소년이란 설정이 또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아들에게 절절매는 아버지의 모습이, 또 그 아이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호정이 무심결인 듯 자전거를 타고 그 애를 따라가는 모습에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호정의 남편 영작이 젊은 애인을 만나 섹스하는 장면에서 기어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몸짓 때문이었다. 차라리 두 남녀가 엉겨 붙어 헉헉거렸더라면, 둘 다 무아지경에서 물고 빨고 했더라면 그저 야하구나 하고 지나쳤을 장면인데,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젊은 여자가 제 몸의, 제 마음의 어느 끝을 향해 애쓰는 모습에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장면, 고백하자면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욕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욕은 '~년'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냥 이년아, 저년아 하는 것에서부터 씨발년까지 나오면 아주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 되고야 말았었다. 아주 어릴 적 친구 아버지가(아주 자상하고 좋은, 교양있는 아빠다) 하나밖에 없는 그의 딸을 부를 때 '어이구 이년' 해서 기겁을 했던 적도 있었었다. 들어도 들어도 면역이 되지 않는 그 고약한 욕을 결국은 영화에서 듣고야 말았는데….

호정과 영작의 아이(입양한 아이)가 불각시에 죽고 호정이 슬픔을 다스리기 위해 깊은 산 속으로 홀로 산행을 한(그녀는 거기 비 오는 산 속에서 홀로 통곡한다)후 돌아온 날이었을 것이다. 영작도 슬펐을 터. 둘은 급기야 서로가 피운 바람에 대해, 그간의 삶에 대해 서로 비웃으며 싸우기 시작한다. 영작은 말한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너나 잘해”라고 말하는 호정에게 “이 쌍년아, 너는 뭐가 잘났어?”라고. 그리고는 여자를 팬다. 때리지 말라는 호정을, 바로 그 욕을 하면서 팬다.

기억의 왜곡인지, 재편집인지 몰라도 더 기가 막힌 것은 호정이 영작과 싸우기 전에 읽었던 책은 바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었다는 사실. 세상에. 저런 책을 읽는 여자를, 그 책을 들고 있던 여자에게 저런 욕을 하면서 깁스를 할 만큼 손목을 꺾어버리다니. 내 속의 어떤 것이 그 책 제목과 그 상황에서 확 무너져버리는 심정이었다. 참! 살아 무엇 하리!

'이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내게, 그 풍경은 참 슬프게도 때리고 슬프게도 맞는 몸짓으로 보였다. 가엾다. 느이들이, 그리고 내가.

한번 터진 봇물은 주체할 수 없었다. 아내와 싸우고, 아버지도 아들도 죽고, 난 오늘 너하고 해야 되,라고 절규하며 달려간 애인의 집 앞에서 다른 남자와 만나게 된 영작의 얼굴표정, 미안해, 미안해하며 비칠거리며 걸어가던 영작의 뒤를 따라 말없이 걸어가던 애인의 등짝. 술 취한 영작에게 꽂히던 택시기사의 “미친 놈”하던 말. 시도 때도 없이 물구나무서던 호정의 거꾸로 보이는 얼굴. 어린 청년과 섹스하며 울던 호정의 몸의 선….

어느 장면이 안 슬펐던가. 아무도 울지 않는 영화를 보면서 쿨쩍거리는 게 이상하게 민망해서 참아도 보고, 재채기로 무마해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버일 수도 있지만, 내 감정에 취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모든 몸짓들이 슬퍼서 내가 울기는 했지만 끝끝내 제대로 된 엔딩도 못 본 채 나온 이유는 실은 따로 있다. 실로 서로가 쿨하게 헤어지고 새롭게 희망을 갖고 해피하게 엔딩하는 장면이라고 많은 이들이 극찬하던 그 장면! 잘할게, 잘할게 하다가 안 먹히자 마치 무용하듯이 펄쩍 뛰어오르던 영작이 나가면 호정은 넓은 무용실을 임신한 몸으로 힘차게 대걸레질을 하던 그 장면! 각자 원하는 대로, 욕망하는 바대로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절대 관계 때문에 질척이지는 않는다는 그들의 쿨한 결말이 나라고 맘에 안 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때 내가 컥 하고 마지막 눈물을 삼킨 것은 나는 호정처럼 다시 시작하기는 너무 늦었다는, 자신 없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권혁란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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