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전혜진 지음·구픽 펴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딜루트 지음·동녘 펴냄)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전혜진 지음·구픽 펴냄)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전혜진 지음·구픽 펴냄)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는 신화가 있었다. 그 신화의 변종으로 여성은 과학을 못한다, 여성은 기계를 못 만진다, 여성은 컴퓨터, IT에 약하다는 새로운 신화들이 계속 이어졌다. 진짜 그럴까? 여성이 수학 적성의 생물학적 부족으로 인해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에서 일하기 덜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을 깨트린 최신 연구가 지난해 미국 카네기멜런대에서 나왔다. 이 대학 발달신경과학 제시카 캔틀런(Cantlon) 교수는 이미징 기법을 활용해 여학생 55명과 남학생 49명을 대상으로 뇌기능 연구를 했다. 기본적인 수학 기술을 다루는 교육 비디오를 시청하게 하고 MRI 촬영을 통해 기능을 평가한 결과, 성별에 따른 뇌 발달이나 수학 처리 능력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직업은 물론, 놀이와 여가에서 과학기술은 종종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지만 견고한 신화를 깨는 파열음이 곳곳에서 들린다. 최근 발간된 두 권의 책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와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는 실제 우리 문화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저자들이 분석, 기술한 책이라서 더욱 반갑다.

『순정만화에서 SF의 계보를 찾다』는 먼저 ‘순정만화’의 여왕 황미나를 소환한다. 황미나의 ‘레드문’을 비롯한 수많은 여성 만화가의 작품들이 다른 특성들을 모두 배제당한채 ‘소녀’ ‘로맨스’ ‘순정’ 만화로 명명되어온 데 대해, 그 자신이 SF작가이자 만화스토리작가인 전혜진은 “한국은 SF의 불모지”라는 말이 망언이라고 단언한다. “일단 순정만화라고 하면, 혹은 여성 작가가 그렸다고 하면 진정한 SF가 아닌 것 같다고 깎아내리기도 했다”고 한국 현대만화역사 기술을 비판하는 그는 “지금 한국에서 SF를 읽고 쓰는 사람의 최소 절반 이상이 여성일 수 있게 하는 단단하고 꾸준한 기반이 ‘바로바로’ 순정만화였다”고 말한다.

전혜진이 짚어낸 ‘순정만화’ 속 SF의 계보는 굵고 깊다. 강경옥의 ‘별빛 속에’와 황미나의 ‘레드문’으로 시작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인 신일숙의 ‘1999년 생’, 민송아의 ‘나노리스트’ ‘좀비가 있어도 여고생은 잘 살고 있어요&’ 차경희의 ‘걸스온탑’ 그리고 최근에 ‘며느라기’로 유명한 수신지의 ‘곤GONE’으로 이어진다.

신일숙의 ‘1999년생’은 전쟁과 재해로 피폐해진 지구에 초고도의 과학기술을 지닌 우주인들이 공격해오는 세기말적 이야기다. 지구의 운명을 걸머진 여주인공 크리스는 한국계 소녀로, 남자대원과의 갈등, 크고 작은 성희롱에도 맞서야 한다. 그를 돕는 사람은 같은 여성인 필립스. 저자는 이 작품이 1988년 작품이란 점을 감안했을 때, 여성 리더십과 현실적 갈등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다고 평가한다. 수신지의 ‘곤’은 낙태죄를 소재로 한 신작이다. 낙태 경험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IAT키트가 개발되고 모든 여성에게 검사가 의무화된다면? 1953년 이후 한 번이라도 낙태를 한 여성은 공소시효 없이 무조건 처벌하게 된다면? 처벌받는 것은 낙태의 이유와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여성이다. SF와 현실의 기막힌 융합이다.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딜루트 지음·동녘 펴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딜루트 지음·동녘 펴냄)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는 여성 혐오와 여성 배제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게임시장에 대한 도전장이자 분석서이다. 초창기 게임시장에서 ‘보글보글’이나 ‘테트리스’ 같은 게임은 플레이어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이제 게임이 거대한 글로벌 산업이 된 현실에서 게임쇼의 주역은 총쏘는 게임이나 스포츠 게임, 즉 남성들의 게임이다. 저자 딜루트는 “올 봄 출시된 ‘동물의 숲’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을 때 이 게임이 ‘여심을 저격’해서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고 도대체 그 여심이 뭐냐고 물어보면 명확하게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게임산업 내의 여혐 분위기라고 저자는 문제를 제기한다. 자사 직원이 한국여성민우회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면담 후 사과문을 올리라고 지시했다는 게임회사 사례를 들며, 익명 커뮤니티의 사상검증 현상을 고발한다. 한 성우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라고 쓴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계약 해지되고, 이 성우의 발언에 동의하는 트윗을 한 일러스트레이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고당하는 게임산업의 문제는 반드시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