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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울증이 찾아왔다. 갑자기 일이 바빠지고 책임이 몰아닥치자 나는 나를 불태우고 재가 돼 버렸다.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 일상은 지속돼야 했다. 그냥 죽음으로써 책임감과 의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부터 우울증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니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고 반복되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불편했지만 이런 부작용은 참아 넘길 수 있을 만큼 나의 상태는 심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충격적인 부작용을 깨닫고 말았다. 더이상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없었다.

평소처럼 최애템인 새티스파이어를 들고 자위를 시작했다. 새티스파이어는 내 자위 인생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제품으로, 넉넉잡아도 2~3분이면 끝내주는 오르가즘을 선물해주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새티스파이어를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감질나는 느낌만 찾아올 뿐, 도저히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때는 피곤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냥 그런 날이 가끔은 있나 보다 싶었다.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고 자위를 중간에 포기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이건 정상이 아니라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혹시 약 때문은 아닐까? 복용 중인 약의 부작용을 샅샅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가장 대표적인 우울증약의 종류인 SSRI와 SNRI의 흔한 부작용 목록에 성욕 저하, 성 기능 장애가 포함되어 있었다.

열심히 조사해 본 결과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몇십 분씩 바이브레이터를 붙잡고 있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가 약 때문이라니. 가뜩이나 성욕도 저하됐는데, 막상 자위를 시도해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가 없게 되니, 결국 나는 한 달 넘게 오르가슴을 못 느끼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섹스토이샵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치명적인 부작용이었다. 신제품을 출시하려면 꼭 테스트를 해봐야 하는데, 이래서는 뭐가 좋은 토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던 토이들도 더이상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수많은 좌절의 밤이 이어졌고, 나는 결국 신제품 테스트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게 됐다. 신제품 후보들을 빠짐없이 사용해봤지만, 별 느낌이 없는 토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유포리아 구성원들의 다양한 피드백을 통해 신제품을 엄선할 수 있었지만,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르가슴은 모두에게 소중하다. 건강한 사람에게든, 건강하지 못한 사람에게든. 게다가 오르가슴을 선물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는 남들에게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잃어버린 오르가슴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선사시대적부터 사용하던 토이들을 모두 늘어놓고 내게 맞는 토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중 나은 토이가 있었다. (새티스파이어 미니에게 감사를)

의사에게 말해 약을 여러 번 바꿔보기도 했다. (“선생님. 오르가슴이 느껴지질 않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주로 남성분들이 많이 말씀하시기는 하는데, 그런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요. 다른 약으로 바꿔볼게요. 너무 심하면 저녁 약 먹기 직전, 약효가 좀 빠졌을 때 성관계나 자위를 하면 좀 나을 수 있어요.”) 약을 바꿔보고 여러 토이를 사용해보며 최상의 조합을 찾아 나가자 다행히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예전처럼 민감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1달이나 오르가슴을 못 느낄 정도의 비극적 상황은 더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예전보다 시간을 몇 분만 더 들이면 매일매일 오르가슴을 느끼는 것도 가능해졌다.

부작용을 깨닫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쇼핑몰을 운영하며 받았던 몇몇 질문들이 생각났다. 본인이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쉽게 느끼기가 어려운데, 추천할만한 제품이 있냐는 문의였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예전보다 더 나은 답변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함께 공감하고 고민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의사는 성 기능 부작용은 남성이 더 많이 호소하는 부작용이라고 했지만, 정말 남성에게 더 빈번히 발생하는 부작용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나와 비슷한 수많은 여성들도 비슷한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 부작용을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약물 부작용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알게 되더라도 말을 못 꺼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이, 포기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본인의 오르가슴을 찾아 나섰으면 좋겠다. 잘 맞는 약을 찾기 위해서 의사에게 솔직하게 고충을 나누고 (이런 얘기까지 진료실에서 해도 되나 싶더라도), 본인에게 잘 맞는 토이를 찾기 위해 더 고민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오르가슴은 평등해야 하니까.

 

안진영 유포리아 대표·칼럼니스트 ⓒ안진영 대표 제공
안진영 유포리아 대표·칼럼니스트 ⓒ안진영 대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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