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원의 당신 곁에서] 혐오 넘어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여는 당신에게
[김정희원의 당신 곁에서] 혐오 넘어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여는 당신에게
  •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 승인 2020.08.15 07:55
  • 수정 2020-09-17 1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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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신촌역에 게시됐던 성소수자 차별 반대 광고판이 훼손되자 시민들이 포스트잇으로 '성소수자'라는 글자를 복구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지난 3일 서울 마포구 신촌역에 게시됐던 성소수자 차별 반대 광고판이 훼손되자 시민들이 포스트잇으로 '성소수자'라는 글자를 복구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얼마 전 ‘국제 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신촌역에 게시되었던 광고가 단 이틀 만에 무참히 훼손되었던 일이 있었다. 그다지 급진적인 내용을 담은 광고도 아니었다. 성소수자들의 다채로운 얼굴 사진을 모아 콜라주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들어 게시했을 뿐이다.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 마치 차분하게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듯한 이 문구가, 왜 어떤 이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혐오와 위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검거된 범인은 “성소수자가 싫어서 그랬다”고 분명하게 진술했다고 하니, 우리 사회의 한구석에는 여전히 증오와 폭력으로 똘똘 뭉친 이들이 있는 모양이다.

낡은 권력에 물들어 있는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과 맞서 세상을 바꾸는 과정은 당연히 의미있는 일이지만 동시에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감정 노동을 수반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혐오와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거나, 혹은 언제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성소수자가 언급되는 기사에는 차마 여기에 옮겨적을 수 없는 끔찍한 댓글이 달린다. 생존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며 억압과 불평등에 저항하는 이들은 보다 광범위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폭력적인 말을 듣기도 하고, 부당하게 해고당하기도 하고, 혹은 가족과 결별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소수자를 상대로 혐오를 표출하는 행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혐오 범죄가 발생해도 피해 자체가 사소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가해자는 처벌조차 받지 않았다. 즉, 혐오는 단순히 사회에 만연한 ‘정서’ 혹은 ‘대중 감정’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을 제도적으로 용인하는 법과 통치의 구성 원리다. 법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마사 누스봄은 법의 제정 및 집행 과정에서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 중의 하나로 ‘혐오(disgust)’와 ‘수치심(shame)’의 대립 구조를 언급한 바 있다. 이른바 ‘주류 일반’의 정서로서 혐오는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동성 커플을 살해했던 한 남성은 자신을 변호하는 논리로 자신이 그 순간 느꼈던 혐오감을 들먹였다. 한편 수치심은 전형적인 처벌 기제의 하나이지만 (신상공개가 대표적인 사례다), 소수자를 포함하는 경우에는 수치심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진다. 군대에서 동성애자를 ‘색출’하고 군형법으로 처벌한다고 할 때, 이 폭력적인 제도가 건드리는 것은 정확하게 수치심이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낙인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혐오와 수치심은 본질적으로 위계적인 관계를 갖고 있고, 한 사회의 차별과 억압 구조를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뒷받침한다.

미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까지 오랜 기간 사회적 진통이 있었다. 지금의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동성애 (당시에는 ‘LGBT’ 혹은 ‘퀴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 않았다) 항목이 법안에 포함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한때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주장의 근거로 ‘혐오’가 반복적으로 제시되었는데, 평균적인 미국 국민이(“the average man”이라고 표현되었다)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미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논리에서 여전히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어떤 이들이 “국민 정서를 고려해야한다” 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시기상조론을 펼칠 때, 여기서 국민 정서 혹은 사회적 합의는 단지 ‘혐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물론 자신의 혐오를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나 평등의 원칙이 국민 정서로 결정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차별금지법에 대한 높은 지지는 명확하고, 심지어 혐오가 일반화되어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혐오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동시에 그 어떤 사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당하고 부당하게 수치심을 느껴야 할 근거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혐오, 차별, 폭력이 법적으로 묵인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법이 차별과 혐오를 방조할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오랫동안 여성은 ‘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어 참정권이 없었으며, 흑인은 ‘법적으로’ 백인들과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상기하길 바란다. 물론 이런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국제 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기획되었던 광고는, 그 훼손의 시도가 무색할 정도로, 퀴어들의 넘치는 생명력(queer vitality)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과정으로 복구되었다. 시민들은 발빠르게 움직였고, 포스트잇, 스티커, 그리고 사진으로 광고가 사라진 빈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다음 날 광고가 다시 걸렸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많은 이들이 찾아와 그 위에 응원과 지지의 표식을 남기고 있다. 억압과 상처로 단련된 이들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회복의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저항과 연대의 새로운 문법을 발명해낸다. 혹시 또 누군가가 광고를 찢으려 할까? 그래도 괜찮다. 마지막 순간까지 혐오에 매달리는 이들은 늘 그랬듯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테니까. 혐오를 넘어 평등과 연대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당신을 오늘 신촌역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우리 모두의 일상 속에 함께하는 성소수자를 기억하면서, 작은 쪽지를 한 장 남기고 오면 어떨까.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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