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故) 최숙현 선수의 고발로 스포츠폭력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프랑스·중국·일본에서도 선수들이 상습적인 폭력이나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고발이 나왔다. 대대적인 실태조사와 가해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마련에 착수한 나라도 있고, 침묵하는 나라도 있다. IOC는 스포츠분야 인권침해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며 “스포츠 폭력은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올림픽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피겨스케이팅 코치들 성폭력·폭력 고발 잇따라
1월 사라 아비트볼 폭로 후 프랑스 체육부 실태조사
프랑스빙상연맹은 사안 은폐·침묵

프랑스의 피겨스케이팅 스타 사라 아비트볼은 올해 1월 자서전을 출간하고 “15세~17세 때, 당시 코치 질 베이에르가 나를 성폭행했다”고 폭로했다. ⓒ온라인 캡처
프랑스의 피겨스케이팅 스타 사라 아비트볼은 올해 1월 자서전을 출간하고 “15세~17세 때, 당시 코치 질 베이에르가 나를 성폭행했다”고 폭로했다. 프랑스 여러 언론은 이 문제를 집중 보도했다. ⓒL'obs, Lequipe 표지 온라인 캡처

지난 4일(이하 현지 시간) Franceinfo, AFP통신 등 언론은 “프랑스 빙상스포츠 코치 20여 명이 선수들에게 성적 학대나 폭력·폭언을 일삼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전했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빙상연맹(FFSG)과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을 대상으로 지난 2월부터 약 반년간 조사한 결과다. 코치 총 21명 중 12명이 선수 성폭행과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고, 이 중 3명은 과거 징역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7명은 물리적 또는 언어폭력을 저질렀고, 2명은 사법 절차 종료 전 사망했다. 보고서에는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프랑스 체육부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검찰에 전달하고, 가해 코치들이 재판을 받도록 할 계획이다.

시작은 프랑스의 피겨스케이팅 스타이자 2000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리스트인 사라 아비트볼의 폭로였다. 아비트볼은 올해 1월 자서전을 통해 “30여 년 전인 15세~17세 때, 당시 코치였던 질 베이에르가 나를 수차례 성폭행했다”고 폭로했다. 아비트볼은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프랑스빙상연맹을 비롯한 피겨스케이팅 관계자들이 사건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아비트볼에 이어 다른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 3명도 10대 시절 베이에르와 다른 코치들의 성폭력을 폭로했다.

프랑스 검찰은 즉시 베이에르를 포함해 가해자로 지목된 코치들의 미성년자 선수 대상 성범죄 의혹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프랑스 체육부도 2월부터 프랑스 운동협회 내 선수들의 성폭력 실태조사에 나섰다. 디디에 가야게 프랑스빙상연맹 회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프랑스 체육부는 이번 실태조사 결과 “프랑스빙상연맹은 코치들의 폭력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처벌은커녕 단순 조사조차 하지 않고 은폐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사안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주무부처·단체의 수장이 전부 스포츠 선수 출신 여성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왼쪽부터) 나탈리 페샬라 신임 프랑스빙상연맹 회장,록사나 마라시노뉘 프랑스 체육부 장관. ⓒ나탈리 페샬라 회장 페이스북 캡처, 프랑스 정부 공식 웹사이트 캡처
프랑스 피겨스케이팅 내 폭력 실태 해결을 맡은 주무부처·단체의 수장 모두 선수 출신 여성이다. (왼쪽부터) 나탈리 페샬라 신임 프랑스빙상연맹 회장,록사나 마라시노뉘 프랑스 체육부 장관. ⓒ나탈리 페샬라 회장 페이스북 캡처, 프랑스 정부 공식 웹사이트 캡처

이번 사안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주무부처·단체의 수장이 전부 스포츠 선수 출신 여성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오명을 쓰고 물러난 가야게 회장 대신 사태 수습을 지휘하게 된 나탈리 페샬라 신임 프랑스빙상연맹 회장은 지난달 28일 Parisien지와의 인터뷰에서 “제가 3개월 만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면서도 인권 교육 실시, 연맹 내 윤리위원회 설치 등 해결책을 마련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페샬라 회장은 피겨스케이팅 아이스 댄스 선수 출신이다. 록사나 마라시노뉘 프랑스 체육부 장관은 최근 프랑스 여러 스포츠 분야의 성폭력 실태가 알려지면서 대대적인 실태조사와 대책 마련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마라시노뉘 장관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배영 200m 은메달리스트 등 기록을 세운 전 수영선수다.

중국 내 피겨스케이팅 폭력 실태 폭로
“어린 소녀들 착취 노출돼...IOC 인권보호 노력해야”

2017년 사대륙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슈란 유의 모습 ⓒWikimedia Commons
2017년 사대륙 피겨스케이팅 세계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슈란 유의 모습 ⓒWikimedia Commons

 

지난달 21일, 중국계 싱가포르인이자 전 피겨스케이트팅 선수 슈란 유(于书然)는 중국 피겨스케이팅 코치들의 선수 폭력 실태를 고발했다. 유는 이날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신체적 학대는 중국에서 매우 흔한 일”이며 “선수들은 종종 ‘멍청하다’ ‘덜떨어졌다’ ‘쓸모없다’ ‘뚱뚱하다’ 등 비난받는다”고 말했다.

유는 자신이 어린 시절 중국에서 훈련하며 직접 겪은 코치들의 폭력을 털어놓았다. “11세 때부터 실수할 때마다 맞았다. 심할 때는 하루에 10번도 넘게 맞았는데 살갗이 벗겨질 정도였다. 14살에는 점프 자세가 흐트러졌다는 이유로 코치가 불러내 스케이트 토픽으로 정강이뼈를 때렸다. 절뚝거리거나 울어선 안 됐고 다시 점프해야 했다. 이런 폭행 대부분은 링크에서 연습 중인 다른 선수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났다. 비인간적인 경험이었다.”

올해 19세인 유는 최근 미국 체조계 성폭력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영국과 일본 등 각국의 스포츠폭력 관련 언론 보도를 보고 용기를 냈고, 싱가포르 아이스 스케이팅 연맹 등에 자신이 경험한 피해 실태를 알렸다고 했다. “나는 중국에서 훈련을 받았어도 싱가포르 국가대표니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중국 선수들은 커리어가 달린 문제라서 입을 열기 어려울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유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어린 여성 선수들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아동 학대 전문가들이 전담하는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선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체조, 피겨스케이팅처럼 미적 요소를 중시하는 스포츠는 어른들이 야심에 찬 소녀들을 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는 의상, 메이크업, 몸매 등 외모로 평가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문제 제기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 아동청소년 선수 학대 실태보고서 발간
폭력·성폭력 고발...“군사주의” 원인 지목

휴먼라이츠워치가 지난 7월 20일 발간한 ‘일본 내 아동·청소년 운동선수 학대 실태’ 보고서 표지 ⓒHuman Rights Watch
“셀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 휴먼라이츠워치가 지난 7월 20일 발간한 ‘일본 내 아동·청소년 운동선수 학대 실태’ 보고서 표지 ⓒHuman Rights Watch
 

일본에서도 여러 스포츠 분야 선수들이 상습적인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달 20일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일본 내 50개 종목 전현직 선수 800여 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하고, 8개 스포츠 기관과의 면담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일본 내 아동·청소년 운동선수 학대 실태’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 부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다. 

응답자의 총 18%가 “멍청이” 등 언어폭력을 겪었다고 답했고, 5%는 어린 시절 성폭행이나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성폭력의 경우 부상 치료를 핑계로 신체 접촉, 합숙소 내 성폭행 사례가 많았다. 24세 이하 응답자 381명 중 19%는 주먹질, 뺨 때리기, 발로 차기, 땅바닥에 내리꽂기, 물건으로 때리기 등을 겪었다고 답했다. 음식과 물을 먹지 못하게 하거나 머리카락을 강제로 자르는 등의 폭력 고발도 나왔다. 코치들이 폭력을 휘두르면 선배들은 후배들에게도 똑같이 폭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폭력을 “애정” “성적 향상을 위한 훈육 방법”이라고 보는 응답자들도 많았다. 

휴먼라이츠워치는 2차 세계대전 등 전쟁을 겪으며 일본에 자리 잡은 군사주의가 스포츠폭력 대물림·정당화의 근원이라고 지적하고, 2013년에도 일본 내 스포츠폭력 고발이 나왔지만 바뀐 게 없다며 일본올림픽위원회(JOC)와 일본스포츠위원회(JSC)에 입장 표명을 요청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스포츠폭력 실태조사에 응한 선수들은 “훈련하면서 성학대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대표가 되려 노력한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Human Rights Watch 유튜브 영상 캡처
휴먼라이츠워치의 스포츠폭력 실태조사에 응한 선수들은 “훈련하면서 성학대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국가대표가 되려 노력한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Human Rights Watch 유튜브 영상 캡처

IOC는 최근 중국, 일본 내 스포츠폭력 실태 고발에 대해 관련 내용을 인지하고 있다며, “모든 학대는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올림픽의 가치에 위배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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