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XF] 콘돔 미리 준비하는 여자, 뭐 어때?
[SXF] 콘돔 미리 준비하는 여자, 뭐 어때?
  • 은파도
  • 승인 2020.08.15 00:05
  • 수정 2020-08-17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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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Netflix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Netflix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Netflix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첫 화 중 등장인물들이 올바른 콘돔 착용법을 보여주는 장면 ⓒNetflix

 

얼마 전 우연히 넷플릭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를 시청했다. 영국 고등학생들의 성(性)에 관한 고민과 갈등이 주제인 이 드라마는 10대들의 섹스, 피임, 임신에 대한 두려움, 낙태, 동성 간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굳이 청소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결론으로 과도하게 몰아가지도 않았다. 청소년들의 섹스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선정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현재 청소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느꼈다.

주인공인 오티스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상태로 같은 학년의 여자 친구와 첫 섹스를 하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전날 기억이 없는 오티스가 본인이 콘돔을 착용했는지 묻자 상대 여성은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피임을 했다는 기억이 점점 불확실해지자 둘은 사후피임약을 구매하기 위해 함께 약국에 들리고, 여성이 약을 먹고 나서야 안심한다.

그 에피소드를 보고 아주 오래전 나의 대학 시절이 생각났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첫 섹스를 할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피임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독립하지 않은 그 시절 임신을 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잠시 생각해본다. 독립한 지금도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 인한 삶의 변화는 너무나도 큰 것을 볼 때 스무 살 남짓의 나는 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왜 나는 피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피임의 중요성 자체를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성인이 됐으니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겠어’ ‘드디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첫 밤을 보낼 수 있구나’에 초점을 뒀던 것 같다.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 중 성교육을 받은 것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그 내용도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임산과 출산이 진행된다는 생물학적 관점에 그쳤다. 내가 ‘왜’ 피임을 해야 하며, 피임의 종류와 장단점은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그런 내용은 패션 잡지에 별자리 운세와 함께 나와 있던 글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 떠도는 글로 배우는 정도였다.

그러다 남자친구와의 섹스 횟수가 늘어나면서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당시 남자친구와의 섹스는 계획적이라기보다는 보통 자취방에서 함께 영화를 보다 분위기에 이끌리거나, 함께 술을 마시다 즉흥적으로 모텔에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나와 남자친구 모두 ‘콘돔을 반드시 사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내 생리 주기를 계산해 배란일 전후 3일간은 체외 사정을 하는 것이 유일한 피임법이었다. 어느 날 생리가 일주일 늦어지며 공포와 패닉에 빠졌다. 임신 테스트기를 언제부터 쓸 수 있는지 인터넷 정보를 검색해가면서 남자친구에게도 절친에게도 말도 못 한 채 마음을 졸였는데, 다행히도 생리 예정일이 10일이 지난 뒤 드디어 생리가 시작됐다. 매달 떼인 돈 받으러 오는 것처럼 한 번도 빼먹지 않던 그 귀찮은 생리가 그때만큼 반가웠던 적이 없었다.

이후 나는 남자친구에게 종종 콘돔을 사 올 것을 요구했지만 반응은 “콘돔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좋은 분위기를 끊고 싶지 않다”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물러터져서 ‘그래. 뭐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유야무야 넘어갔다. 미국 영화나 시트콤의 섹스신에서 화장실이나 침대 서랍에 콘돔 박스를 찾는 장면을 볼 때면 ‘드라마에서는 저런 게 참 자연스러운데, 왜 우리에겐 그렇게도 어려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라면 미리 콘돔을 준비했겠지만, 당시의 나는 여자가 콘돔을 미리 준비해간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쑥스러웠다. 아마도 섹스를 너무 적극적으로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의식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피임약 복용이었다. 호르몬 부작용으로 종종 구토와 어지럼증을 느꼈다. 게다가 생리 기간을 제외하고는 매일 빼먹지 않고 복용해야 했기에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궁에 피임기구를 시술하자니 미혼에 출산 경험이 없던 당시의 나에겐 너무나 두려운 방법이었다.

결혼 전 한 남자친구는 콘돔 없이 섹스하다 만약 내가 임신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가게 될 것 같다는 뉘앙스의 얘기들을 종종 했다. 결혼하게 되더라도 어느 정도 신혼 생활을 보낸 뒤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었던 나는 장기 피임약 복용을 선택했다. 그 사실을 굳이 남자친구에게 알리지 않았고 사귀는 기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콘돔을 착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생리 때마다 두려워하는 일은 더 없었다.

결혼 전까지 나는 여러 명의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그들과 섹스를 했지만, 피임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한 상대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나의 마지막 남자친구이자 내 아이의 아빠인 지금의 남편이다. 사실 처음엔 남편도 피임 지식이 부족했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콘돔도 주로 내가 구매했고, 출산 후에는 정관 수술도 적극 권했다. 섹스는 물론 즐거운 것이지만 서로의 생각과 의견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임신까지 이어질 때 그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 될 것 같았다. 섹스의 즐거움을 서로가 온전히 나누기 위해서는 철저히 피임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완전한 피임은 관계에 평등을 가져왔고, 걱정 없이 섹스에 집중할 수 있어 즐거움을 더했다.

나의 건강 때문에도 피임을 적극적으로 했다. 둘째를 임신했지만 착상이 불안정했고 자궁에 피가 고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질에 약을 삽입하고 몇 주간 누워만 있었지만 결국 유산하게 됐다. 그 후 마치 출산했을 때처럼 온몸의 관절이 시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수면 바지와 양말을 신을 수밖에 없었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 유산 후 한동안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심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그 후 추가 출산 계획은 완전히 접었고 남편은 정관수술을 하는 것으로 내 인생의 피임을 종결했다.

피임은 내 몸을 보호하는 수단이자 나의 인권을 위해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깨닫게 돼 아쉽다. 20대에는 다행히도 운이 좋아 섹스로 인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거나 성병을 얻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섹스 상대와 피임에 대해 자연스럽게 논의할 수 있고 피임을 요구해야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어릴 적 나에게 다시 알려주고 싶다.

 

필자 은파도 (대관 경력 15년차 직장인·『당신의 섹스는 평등한가요?』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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