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뉴질랜드 외교관, 직원 성추행 의혹
“성비위 무관용” 외치던 외교부 ‘경징계’
뉴질랜드 총리가 정상 통화서 언급까지

뉴질랜드 방송 '뉴스허브'가 지난 달 보도한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사건. 사진=뉴스허브 캡처
뉴질랜드 방송 '뉴스허브'가 지난 달 보도한 한국 외교관의 성추행 사건. 사진=뉴스허브 캡처

 

뉴질랜드에서 우리나라 외교관이 성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는 내용의 국내 언론 보도에는 두가지 키워드가 눈에 띈다. ‘국제 망신’, 그리고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는 ‘이례적으로 망신스러운’ 것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성범죄의 심각성과 보편성, 그리고 사회 전반적인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우리나라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해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 없이, 강영수 부장판사가 손정우에 대한 미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불허한 덕에 전 세계로부터 우리나라가 아동 성착취범 비호국이라고 비난받은 것이 바로 몇 주 전의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 공무원이 해외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뉴스는 미국, 칠레, 에티오피아, 일본 등 세계 각지로부터 심심찮게 들어오던 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망신스럽고, 또 이례적인가? 언론의 주요 논조는 ‘개인’이 연루된 성범죄 사건을 한 ‘국가’의 수장이 직접 언급한 것이 이례적이고, 그것을 우리나라 국가 수장이 직접 들어야만 한 것이 망신스럽다는 것이다.

국가 간 풀어야 하는 수많은 정치 경제 외교적 사안 가운데 정상 간 직접 대화를 통해서만 풀 수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정상회담이나 정상통화의 안건으로 채택된다. 국민을 범죄 피해로부터 구제하는 일이라면 성범죄 사건이라고 해서 정상통화에서 논의되지 못할 법은 없다. 하지만 관련 법, 치안, 사법 체계가 다 마련되어 있는데도 성범죄 사건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국가 정상이 직접 동원되어야 한다면 이례적인 것은 분명하다.

뉴질랜드 언론에 따르면 해당 우리나라 외교관은 2017년 말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서 한 직원에게 세 차례에 걸쳐 성추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8년 초 해당 외교관이 임기를 이유로 뉴질랜드를 떠난 후, 피해자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의 고통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아던 총리가 정상통화 중 언급한 덕에 이 사건은 전 세계에 널리 보도되었고, 우리나라는 소위 ‘K-망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진정한 공로자는 여러 차례의 사건 해결 기회를 내친 우리 정부이다. 초기에 피해자는 뉴질랜드 경찰이나 인권위원회가 아닌 한국대사관 상부에 사건을 신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외교부가 해당 외교관에게 내린 감봉 1개월이라는 징계는 혐의를 인정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피해자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대사관 측이 피해자에게 ‘잊고 털어버리라 (put it in the past and move on)’는 말로 사건을 정리하려 했을 때 피해자는 뉴질랜드 경찰에 사건을 다시 신고했다.

뉴질랜드 경찰과 외교통상부, 필립 터너 주한 뉴질랜드 대사는 사건 현장 검증, CCTV 기록 및 한국 외교부의 자체조사보고서 열람 등을 위해 우리 정부에 수차례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지금껏 비협조로 일관했다. 또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을 때도, 이상진 주뉴질랜드 한국대사는 해당 외교관이 뉴질랜드에 돌아와서 수사를 받을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 (a matter for Kim himself)’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해당 외교관이 성범죄 의혹 속에서도 유유히 뉴질랜드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외교적 면책특권 때문이다. 외교관은 부임지에서 어떤 형태의 체포나 구금도 당하지 않으며,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된다. 현재 해당 외교관은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의 협조 없이는 수사가 불가능하다.

모든 특권에는 평등의 원칙을 깨는 다름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외교관이 면책특권을 누리는 이유는 그가 직무를 통해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대표하기 때문이지, 타인의 인권과 사회규범의 우위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범죄 혐의와 수사 협조 요청을 무시할 수 있는 우리 외교관들의 얇팍한 특권은 정상통화 중 안건에 없는 문제를 제기하여 자국민들을 성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분노로부터 구출한 아던 총리의 대담한 특권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진다.

이례적인 정상통화 뒤에는 뉴질랜드 언론의 역할도 컸다. 뉴질랜드 언론은 양국 정부가 이 사건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4월 외교부 장관회의와 7월 차관회의 모두 이 사건을 거론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특히, 정상통화가 있기 며칠 전 방송된 심층탐사TV보도와 신문기사들은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 동시에 아던 총리의 개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제 공은 다시 우리에게 넘어왔다. 우리 언론의 말과 달리, 이 사건을 바라보고 다룸에 있어서 진정 이례적이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외교관의 성비위 근절을 강조하며 취임했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그동안 측근들의 성범죄 혐의를 묵시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성폭력 무관용의 원칙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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