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
철인3종 선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인권의식 높아졌는데 체육계 변화는 더뎌
고 최숙현 선수가 남긴 과제
가해자·체육계 영향력 벗어난
독립적·전문적 피해지원기구 필요
가해자 엄벌 넘어 스포츠 개혁 시급

성적지상주의·엘리트 스포츠 대신
‘모두를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으로
여성 지도자·임원 늘리고
리더의 성인지감수성 높여야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 ⓒ홍수형 기자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 ⓒ홍수형 기자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스물둘에 삶을 마감한 고(故) 최숙현 트라이애슬론(철인3종경기) 선수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6월 26일, 최 선수는 전 소속팀인 경주시청 지도자와 선수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생전 그는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 도움을 청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경주시, 경주경찰서,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국가인권위원회, 대한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모두 최 선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성적지상주의를 앞세워 폭력을 방관해온 체육계의 현실과 작동하지 않는 피해 구제 시스템이, 또다시 누군가가 죽어서야 드러났다.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스포츠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시민사회가 모였다. 지난 20일 출범 기자회견을 연 ‘철인3종 선수 사망사건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다. 

문경란 공대위 상임공동대표를 28일 만났다. 문 대표는 “최 선수가 우리에게 재난 경보를 울렸다”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참지 않아요. 인권을 침해당하면 신고를 하죠. 그런데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성적을 핑계로 폭력을 저지르고, 신고해도 바뀌는 게 없다면요.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지 않겠어요? 제2, 제3의 최숙현이 또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이런 일이 계속될까 두렵습니다.”

- 2000년대부터 많은 스포츠 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고, 정부와 체육계가 매번 대책을 내놨지만 달라진 게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가해자 개개인도 문제지만, 한국 엘리트 스포츠 현장에 폭력이 횡행하고 있어요. 매번 ‘불량품’을 찾아내어 버리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걸 넘어 왜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나 구조를 살펴봐야죠. 스포츠 개혁이 시급합니다. ‘메달을 위해서라면 인권은 유보될 수 있다’는 성적지상주의·엘리트 중심 시스템을 벗어나 ‘모두를 위한 스포츠’로 가야 합니다. 그게 최 선수가 우리에게 던진 과제입니다.”

문 대표는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혁신위)를 이끌었다. 지난해 스포츠 ‘미투(#MeToo)’ 고발이 이어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철저한 조사와 엄벌, 스포츠 성적지상주의 전면 재검토 등을 주문했다. 이어 문체부 주도로 발족한 혁신위는 1년간 총 7차례 권고안을 발표하고 올 1월 활동을 마쳤다. 

- 혁신위는 “강력한 피해자 보호 및 지원 체계를 구축”하라고 문체부 등에 권고했고, 다음 달 ‘스포츠윤리센터’가 문을 엽니다. 과연 권고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우려도 나오는데요.

“스포츠윤리센터의 핵심은 독립성·전문성·신뢰성입니다. 기존 체육계의 피해 신고·지원체계와는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가해자나 관계자들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체육단체나 연맹은 스포츠 인권침해 사건 조사나 징계에선 손을 떼고, 스포츠윤리센터나 인권위로 사건을 보내야 합니다. 접근성도 중요해요. 누구나 쉽게 센터를 찾을 수 있어야죠. 전문 상담원이 365일 온·오프라인 신고를 접수하고요. 그래도 본인이 직접 신고하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아동학대 신고의무자 제도처럼, 주변인이 스포츠폭력 피해를 발견하거나 의심하면 대신 신고하게 의무화하면 효과가 있을 겁니다. 

스포츠윤리센터의 전문성도 의문입니다. 인권침해에 반부패·불공정 사건까지 조사한다는데, 총원은 고작 25명, 피해 조사·지원 실무자는 10여 명, 특히 상담사는 3명뿐입니다. 인력을 충원한다니 지켜봐야겠지만요. 원래 명칭인 ‘스포츠인권윤리센터’에서 국가의 책무를 강조하는 ‘인권’이 빠진 것도 아쉽습니다.”

- 혁신위는 피해자 보호·지원방안 외에도 학교 체육 정상화, 스포츠 인권 강화, 스포츠기본법 제정 등을 권고했지만,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체육계가 반발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는 혁신위 권고안 이행에 소극적이었고, 문체부는 대한체육회 관리감독에 소홀해, 결국 둘 다 최 선수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2018년 쇼트트랙 조재범 코치의 성폭력 이후 여러 문제제기와 대책이 나왔지만, 다른 현안과 여야 정쟁에 스포츠 문제는 뒷전이 됐어요. 정부, 대한체육회, 국회도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죠.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으면 스포츠 현장의 많은 문제를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체육계에서 저항했다지만, 권고안을 지지한 체육인들, 목소리를 내지 못한 많은 선수들 의견이 얼마나 대변됐는지도 생각해봐야죠.”

지난 6월 26일 스포츠혁신위원회 문경란(왼쪽에서 두 번째)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스포츠 인권 증진 및 참여 확대 정책과 스포츠기본법 제정 권고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 6월 26일 스포츠혁신위원회 문경란(왼쪽에서 두 번째) 위원장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스포츠 인권 증진 및 참여 확대 정책과 스포츠기본법 제정 권고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폭력의 대물림 낳은 성적지상주의
이젠 ‘모두를 위한 스포츠’로 패러다임 바꿔야

반복되는 스포츠 폭력·인권침해의 근원이 ‘성적지상주의’라는 지적은 이번에도 나왔다. 프리스타일 모굴 스키 여자 국가대표였던 서정화 전 혁신위원은 최근 SNS에 “1등, 메달만” 중시하다보니 “누가 옆에서 맞아도, 피해를 당해도, 현역 선수가 죽어도, 침묵한다”는 글을 올렸다. 문 대표도 지난 20일 공대위 출범 기자회견에서 “금메달 100개보다 한 선수의 생명이 중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명제를 되새기며 국가를 향해 엘리트스포츠 존재 의미부터 다시 묻고자 한다”고 말했다. 

“‘국민체육진흥법’은 체육 정책 목적을 ‘국위선양’으로 명시하고 있어요. 그 기조가 폐쇄적, 권위적인 스포츠 현장을 만들었죠. 우리는 엘리트 선수를 빨리 배출하는 데에만 집중했어요. 좋은 성적을 낸 선수에게 연금, 병역 면제 등 특혜를 제공하고, 동시에 (김연아, 손흥민 등) 극소수 성공사례를 강조하고 이상화했죠. 운동에 소질 있는 아이들을 찾아 공부 못해도 성적만 내면 앞날이 보장된다며 과도하게 압박했고요. 그러다 다쳐 운동을 못 하게 되면 그 애들은 갈 데가 없어요. 선수들이 맞아도 항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체제에 편승하게 되는 이유죠. 너무나 강고한 구조예요. 파편적 개혁으론 바꿀 수 없습니다. 혁신위가 피해자 보호·지원 권고에 이어서 근본적인 체계를 바꾸라고 권고했던 까닭입니다.”

- 혁신위는 이제 ‘모두를 위한 스포츠’, 성별·연령·장애 등을 떠나 누구나 존중받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온전하게 향유하는 새로운 스포츠 문화를 추구할 시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누구나 어릴 때부터 스포츠 리터러시(sport literacy)를 습득할 기회를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고 권고했죠.

“스포츠는 모든 시민의 건강과 행복과 존엄을 위한 기본권입니다. 우리가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에 주력할 때 선진국들은 이미 ‘모두를 위한 스포츠(Sports for All)’ 개념을 도입했어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헌장에도 ‘스포츠는 인권’ 조항이 있죠. 한국도 달라져야죠.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대신 전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 클럽을 육성하고, 여기서 선수 풀을 만들자는 겁니다. 국가대표에 들지 못해도, 메달을 못 따도 누구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과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국가가 그 기반을 마련해줘야죠.”

- 문체부에서 제정 추진 중인 ‘스포츠기본법’에 그런 내용을 반영하라고 권고하셨죠. 

“네. 학교 체육부터 바꿔야 해요. 아이들은 스포츠를 통해 배려, 협동, 민주주의, 최선을 다해 도전하고 얻는 승리의 기쁨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법도 배울 수 있죠. 스포츠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민주적인 관계를 맺는 법을 배우고,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생각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고요. 생활스포츠에 투자하면 투자한 3배 이상의 의료보험 절감 효과가 있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저는 지자체장들을 만나면 늘 ‘최고의 복지는 스포츠 복지’라고 말해요.

특히 우리나라 여학생들이 운동을 거의 하지 않는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최근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자는 체력’ 담론이 뜨고 있어서 반갑습니다. 스포츠는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니까요. 약 15년 전 여성 리더십 관련 행사에서 EY 사회공헌 담당 부회장을 만났어요. 장신의 여성이었는데 알고 보니 선수 출신이래요. ‘운동한 사람이 어떻게 그 자리에 갔냐’고 물었더니 뭘 그런 질문을 하느냐, 스포츠 경험이 업무 능력 발휘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아느냐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엘리트 스포츠 죽이기’다, ‘독단적’이다, ‘빨갱이’ 등 공격을 받았는데요. ‘엘리트 스포츠 살리기’입니다. 혁신위 권고안이 모든 걸 해결할 순 없겠지만, 일단 국가가 ‘국위선양이나 성적지상주의가 아닌, 인권에 기반한 모두를 위한 스포츠를 조성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게 중요합니다. 당장 바뀌는 건 없어도 현장에 큰 경각심을 주겠죠. 국가가 진작 그렇게 했다면, 최 선수의 비극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혁신위는 스포츠지도자나 스포츠 단체 임원 중 여성 비율이 낮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여성을 스포츠 지도자로 여기지 않는 성차별이 여전히 만연하죠. 대한체육회 임원(2019년 10월 기준) 중 여성은 고작 15%, 3급 이상 고위직은 남성뿐입니다. 종목별 단체들도 임직원 중 ‘여성 0명’인 단체들이 적지 않아요. 양성평등기본법에 따라 여성 비율 40%는 돼야 하는데도요. 스포츠계 여성 리더들도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해 조재범 사건, 스포츠 미투운동, 올해 최 선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배 여성들이 목소리를 냈나요? 후배들을 위해서도, 리더십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데 말이죠.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려는 노력도 꾸준히 해야 하고요.”

- 2008년 인권위 상임위원 때부터 10년 넘게 스포츠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관련 활동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올해는 스포츠인권연구소를 세우셨죠. 또 어떤 일들을 하실 계획인가요?

“정부의 혁신위 권고 이행 현황을 감시하고, 스포츠 인권 담론을 만들어가려고 연구소를 만든 지 100일쯤 됐네요. 그러다 최 선수 사건이 일어났고, 뭐라도 해보려고 공대위를 만들어 기자회견에 긴급토론회에 정신없이 달려왔어요. 앞으로도 정부와 국회의 진상조사 활동을 감시하고 스포츠 개혁을 요구할 겁니다. 

스포츠 인권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 ‘한 줌’밖에 안 되지만, 이 한 줌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전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성폭력을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인상 깊게 봤어요. 용감하게 목소리를 낸 피해자들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언론, 경찰, 사법부 등 각계의 관계자들이 제 역할을 한 덕에 기록할 만한 사례로 남았죠.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서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더군요. 여성, 장애인, 노인 등 스포츠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차별 없이 참여하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고민하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문경란 공대위 상임공동대표는 현재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를 맡고있다. 1990년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2008년까지 여성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을 지냈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초대 서울시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다. 2017년부터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임 중 2019년 스포츠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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