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논단]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여성논단]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 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 승인 2020.07.30 17:39
  • 수정 2020-07-30 17: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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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비서 안뽑겠다'는 말
권력은 남성 몫 인식 전제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남성의 권력 분산시켜야
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청 앞에서 국가인권위원회까지 한국성폭력상담소 외 8단체가 '서울시에 인권을 여성 노동자에게 평등을' 연대행진 및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7월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8개 여성단체 회원들과 피해자 변호인, 시민들이 보라색 우산을 받쳐 들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를 촉구하는 연대행진을 했다. ⓒ홍수형 기자

 

아일랜드의 성매매 경험 당사자 레이첼 모랜은 저서 『페이드포』에서 말한다. “성매매 여성을 사람이 아닌 듯 취급하는 관점은 놀라울 정도로 흔하다. (...) 자신들이 난폭하게 다루는 존재가 실은 인간임을 느리게 깨닫는 그들의 표정이 말해준다.” 이것은 성착취 현장에서의 특수한 경험만이 아니다.

최근 쏟아진 소식들에 온몸을 두들겨 맞는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 불허,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저지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에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잇따른 공식 조화 행렬,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과 그의 죽음, 이를 둘러싸고 쏟아지는 2차 피해,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임실군 여성 공무원의 죽음까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꿈을 함께 꾸고,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여자들이 아직도 이 사회에서 인간이 아니었음을 섬광처럼 깨닫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일은 개별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하나로 이어져 있다. 가부장적인 사법부가 가부장적인 부정(父情)과 공모하고, 정치권이 공적 정의를 사적 의리로 대체하며, 진실이 애도와 저울질을 당하는 동안에 피해자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한편으로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떠올랐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가는 미자씨는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뿐인 손자밖에 없다. 그러나 손자가 성폭력 가해자인 것을 알게 되고 결국 경찰에 손자를 넘긴다. 사랑하는 손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미자씨는 죽은 아네스의 편에 섰다. 미자씨의 고통스러운 단호함은 우리가 누구에게 공감하고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불법촬영 편파판결 규탄시위가 광장을 뒤덮고 미투 운동이 불붙는 동안에 우리는 그간 몇 명의 아네스를 잃었으며, 몇 번이나 ‘아네스의 노래’를 떠올렸던가 ‘웰컴투비디오’의 성착취 영상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아이들의 이름도 행방도 우리는 아직 모른다.)

서울시 사건이 터지기 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사퇴가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시장 후보로 나선 오거돈씨를 향해 여성계는 ‘성차별 가거든, 성평등 오거돈’ 구호를 외치며 지지를 보냈다. 성평등 가치 실현의 기대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단 한 자리도 여성에게 광역단체장을 내어놓지 않았던 공고한 남성들의 연대와 그 속에서 저질러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 묵살과 방조가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직면해야 한다.

애써 일구어왔던 성평등 추진체계가 권력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성평등 추진체계의 가장 큰 수혜자여야 했을 여성 노동자는 위력에 의한 성추행 앞에 내몰렸다. 그것도 진보와 평등의 가치를 부르짖는 사회적 공동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김지은’들이 노동자로서 일상을 회복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용기를 낸 피해 당사자들 앞에서 우린 무엇을 해야 할까.

부산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진상규명이 이루어졌는지, 대책은 만들어졌으며 제대로 추진하고 있는지 끝까지 감시하고 요구해야 한다. ‘여성 비서를 두지 않겠다’는 말로 언제나 권력의 자리에 남성을 기본 전제로 깔아 온 이들의 권력을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분산시켜야 한다. 이번에도 여성 30% 할당제 도입을 좌초시킨 여당에 혹독한 성찰과 자기반성을 요구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변정희 (사)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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