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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코드 읽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던 '여우'

현명한 여성의 처세, 풍요와

지혜를 상징하는 여성적 코드로 부각

직장 생활 5년 차인 김진영(30·회사원·가명)씨는 요즘 '여우가 되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융통성 없는 성격 때문에 회사 생활에 고민이 많았던 김씨는 얄미운 선배가 교묘히 자신을 따돌리며 상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묘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번 다른 동료나 선배에게 공이 가고 자신은 인정받을 기회를 놓치는 데 위기감을 느낀 김씨는 자기 몫을 챙기고 보다 영악하게 행동하기 위해 열심히 처세 관련 서적을 뒤진다.

영어 강사로 일하는 이명희(28)씨는 주변에 소문난 '여우'다. 재테크에서 경력 관리, 인간 관계, 연애에 이르기까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씨는 자신을 '여우'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기분 좋다고 말한다.

흔히 욕을 하거나 여성을 비하할 때 주로 쓰이던 '여우'가 능력 있고 당당한 신세대 여성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혜롭다', '섹시하다', '영리하다' 등 여성들이 여우에 떠올리는 이미지는 과거의 부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하는 최영희(28·가명)씨는 뒤통수를 치는 여우같은 동료 때문에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토로한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은연중에 한 것이 회사에 퍼져 상사의 눈밖에 나게 된 것. 최씨는 동료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성과나 장점을 주변에 소문내고 좋은 평판을 미리미리 쌓아두는 전략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간혹 여성들끼리의 반목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여우같은 여자'에 대한 여성들의 평가는 관대한 편. 여우가 가진 이미지는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상을 전복시킨다.

한때 여성들의 이러한 마인드를 활용해 여우 마케팅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지난해 현대카드가 내놓은 여성전용카드 '여우카드'는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직장인 여성들을 타깃으로 했다. 명품을 알뜰하게 구매할 수 있는 명품론 서비스를 도입하고 직장이 있는 여성이나 급한 볼 일이 있는 여성회원을 대상으로 육아도우미(베이비시터)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여성들에게 '여우같이' 자기 일과 생활을 즐기라고 말한다. 지난 해 6월 남양유업의 음료 '여우야'가 여우 마케팅으로 톡톡히 광고효과를 보았고, 2030 여성의 마인드를 표방한 여성용품 사이트 여우넷, 여우닷컴, 여우야닷컴 등도 생겨나 인기를 끌고 있다.

본래 서구에서의 '여우같다(foxy)'는 '매력적인', '섹시한' 여성이라는 의미. 일본에서는 도하신(稻荷神)이라 불리며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으로 의미화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 속에서 여우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다. 옛부터 술수와 변화를 부려 인간을 괴롭히는 요물로 인식돼 왔으며 고려사의 고려건국신화에는 조화를 부리는 영물로, 사악한 악물로 등장한다. '여우가 울면 초상이 난다', '여우가 심하게 울면 줄초상이 난다' 등의 속설이 전해지고 각종 영화, 드라마, 문학 작품 등에서 공포를 일으키는 주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전통 문화 속에서 여성이 여우에 비유되는 배경을 살펴보면 여우라는 동물에 대한 경멸이 여성에 대한 비하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영묘한 동물이라는 점은 '사람'이라는 범주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우같다'는 표현은 남성들이 설정한 경계에 여성의 접근을 막는 문화적 금기와 유사하게 작동한다. 이는 여우를 비롯한 동물에 빗대어 여성이 비유될 때 그 의미가 주로 성적 타락자 혹은 외모가 '튀는 이'로 받아들여지고. 동물이나 가축에 비유되곤 하는 배경에는 길들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전지홍(42)씨는 “여성을 동물에 비유하는 것은 성의 상품화, 여성의 외모 지상주의와 맞물린다. 남성은 동물에 비유되어도 강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반면 여성은 대상화된다”고 설명한다. 여성, 약자에 대한 차별 의식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동물을 여성 혹은 약자에게 비유하도록 만드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있다는 설명.

여성학자 정고미라(36)씨는 “인간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결합이다. 여성에 대한 비하와 동물에 대한 비하가 동일한 선상에 놓이는 것 아닌가”라는 반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우가 죽음을 알리는 동물로까지 자리잡은 것은 다른 능력의 표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민속학자들 가운데는 '사람을 홀리는 존재'인 여우에서 여우구슬이라는 상상의 영물을 지닌 동물로 여우를 재의미화하자는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이는 여우를 일반적인 동물이 아닌 영묘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이해했기 때문. 강감찬의 탄생설화에서 여우는 인간사회에 지혜로써 처신하고 풍요를 암시하는 존재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구미호의 개념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본래 상서로운 동물이었을 뿐 아니라 왕의 상징인 '꼬리 아홉'이란 의미에서 구미호라 불렸다고 한다.

페미니스트 언어학자 마리나 야겔로는 <언어와 여성>에서 “성차별적인 내연적 의미를 가진 단어에는 그것을 전도시키면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마치 '블랙'이란 단어가 처음에는 모욕적이고 부끄러운 단어였지만 이제는 자부심을 띤 단어로 변모한 것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경멸적 어휘들은 문자 그대로 뒤바꿔 긍정적이면서도 전투적인 어휘로 변모시킬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교활함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던 '여우' 또한 현명한 여성의 처세, 풍요와 지혜를 상징하는 여성적 코드로 자리잡을 수 있는 소지는 충분하다.

임인숙 기자isim123@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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