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성추행 고소한 피해자 A씨
업무 중 겪은 부당한 상황 일부 공개
낮잠 깨우기, 기분 좋게 해주기 등
여성 비서에게만 요구된 이상한 업무

비서 채용 시 우대조건에
'여성' '용모단정' 내건
기업들 여전히 많아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벗은 속옷 정리, 혈압 측정, 낮잠 깨우기, 기분 좋게 해주기. 5살 어린이들을 돌보는 보육교사의 업무가 아니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던 피해자 A씨가 해야만 했던 업무다. 13일 기자회견에서 A씨는 “비서와 전혀 무관한 업무를 하던 중 지원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차출돼 비서 면접을 봤다”고 말했다.

전문 직업 중 하나인 ‘비서’가 현재의 사회적 인식과 조직문화 속에서 성폭력 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박원순 성추행 사건’은 앞서 일어났던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모두 정치 권력을 가진 유력 정치인이 여성 비서를 향해 저지른 범죄였다. 전문가들은 고질적인 586 정치인들의 성인지 감수성과 당의 제식구 감싸기 등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16일 피해자를 지원하는 여성단체는 A씨가 겪은 불합리한 대우들을 폭로하고 “비서들은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업무에 최선을 다해왔을 것이지만 업무 성격은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으로 구성됐다”면서 “비서의 평가와 교체 여부 역시 이를 중심으로 정해졌다”고 했다.

피해자 A씨의 폭로 후 온라인에서는 A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목격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업무 수행 능력보다는 외모, 나이, 성별이 비서 발탁의 주요한 요소가 된 경우가 많았으며 이른바 ‘심기 보좌’가 주업무 중 하나처럼 취급됐다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자체장의 비서로 일한 B씨와 C씨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제보했다(일부 사항은 제보자 보호를 위해 각색했다).

B씨는 2015년 모 도시 지방자치단체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공무원이 되기 전 B씨는 모델로 용돈벌이를 했고 대학 또한 외모가 눈에 띄는 사람들이 많은 학과를 졸업했다. B씨는 어느 날 상사가 주도한 술자리를 통해 자치단체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 상사가 자치단체장과 친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어 알았기 때문에 이상하다고는 못 느꼈다. 얼마 후 B씨는 상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지자체장의 비서가 됐다.

B씨는 2년 간 비서로 일한 때를 “자치단체장실은 마치 왕의 궁전같았고 나는 궁녀가 된 기분이었다”고 설명했다. B씨는 호의로 어깨를 한 번 두드려준 후부터 종종 50대 남성인 지자체장의 어깨를 주물러줘야 했다. 지자체장은 밤에도 일정 조정을 핑계로 전화를 해 “남자친구랑 같이 있나? 뜨거운 밤 방해했나?” 등 성희롱적인 말을 했다. B씨가 어깨를 주무르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봤지만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술자리를 마련했던 상사는 도리어 ‘아빠와 딸 보는 듯 하다. 보기 좋다’며 칭찬했다. 외모에 신경쓰지 못 한 날이나 지자체장의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여러 사람으로부터 혼이 났다. ‘비서는 지자체장의 얼굴이다. 네가 하는 일이 뭔지는 아느냐’며 혼났다.

D씨는 지자체장 비서로 일한 자신의 언니 C씨의 사례를 전해줬다. C씨는 15년여 전 공무원 생활 중 지자체장의 비서가 됐다. 암묵적으로 해당 지자체에서는 여성들만 비서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입어야 하는 복장과 권고하는 화장 스타일도 있었다. C씨의 언니는 두 차례 부서 변경을 요청했다. 첫 번째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두 번째에는 받아 들여졌다. 받아 들여진 때는 그가 결혼을 알린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지자체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상사는 부서를 이동 하는 C씨에게 다음 비서 일을 할 만한 사람을 찾아야겠다며 ‘어린 나이에 예쁘고 싹싹한 성격에 사무실이 환해질만한 여자’로 아는 사람 없냐고 물었다.

7월 현재 비서를 모집 중인 한 기업의 채용공고. ⓒ캡처

 

△비서를 뽑는 우대사항은 업무능력이 아니라 ‘용모단정한 분’

현재 우리나라에서 비서 직업과 관련된 공식적인 통계는 없다. 비서로 취업하지 않고 경리 등으로 취업했으나 비서 업무를 맡는 경우도 많아 정확한 추산이 어렵다. 다만 여성이 압도적으로 종사할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현재 채용 전문 플랫폼 사람인에서 ‘서울 전체’에서 ‘비서’를 채용 중인 기업은 451개다. 여성만을 채용 중인 공고는 총 56건이며 남성만 채용 중인 공고는 5건이다. 26일까지 회사 임원의 비서를 채용하는 한 무역 업체는 공통 자격요건에 ‘22세~32세 여성’이라고 명시했다. 지원자의 성별을 제한하지 않은 회사들 또한 대다수 지원자 우대사항에 ‘용모단정’을 명시했다.

2018년 한 프랜차이즈 업체는 5년간 회장의 비서를 채용할 때마다 여성만 선발하며 동시에 신체조건 등 외모 기준을 노골적으로 요구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이 업체는 ‘키 165cm 이상의 이영애 닮은 외모’를 지원자격으로 내걸었다가 뭇매를 맞았다.

지난해 7월17일부터 개정 채용절차법이 시행되면서 채용과정에서 구직자의 용모·키·체중 등 신체적 조건을 채용 서류에서 요구하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 또 고용 과정에서 특정 성별만을 대상으로 하는 등 행위 또한 성차별이기 때문에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여성 비서만을 채용하는 기업은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비서를 고용하며 우대사항으로 ‘용모단정’을 명시하거나 몇 년에 걸쳐 여성 비서만을 채용한 경우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처벌 가능성은 낮다. 서류상 외모에 대한 요소를 직관적으로 표기하게 한 것이 아니고 채용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간 점수차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용한 휴대전화 3대에 대한 통신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 ⓒ뉴시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사용한 휴대전화 3대에 대한 통신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됐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 ⓒ뉴시스

 

△비서가 하는 일이란 ‘상사의 기쁨조’ ... 조직이 묵인한 부당한 요구

박원순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 A씨의 피해가 4년에 걸쳐 이어진 데는 조직 내 비서의 위치와 관행, 직업·직무로써 비서에 대한 인식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전문적인 직업인이 아니라 일종의 심부름꾼에 가까운 역할로 보는 인식이 결과적으로 성폭력에 취약한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A씨 측은 앞서 밝힌 입장문에서 시장실에 들리는 직원들이 비서에게 심기 보좌, ‘기쁨조’같은 역할을 사전에 요청하고 결재 후 이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고 밝혔다. B씨 또한 비서로 근무하던 당시 “표정 좋게 하라”는 지시를 수차례 들었다고 말했다.

문주영 숭의대학교 비서행정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비서 개개인의 업무 환경과 감정노동의 강도는 조직과 상사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비서 개인의 감정노동과 심기 보좌를 당연하게 여기는 조직에서는 비서 업무 이상의 사적 업무를 요구받기 쉽다. 부당한 대우를 타 직원에 호소해도 이를 비서의 역할로 보고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비서 노동자들은 고립감을 호소하는데 이는 해당 조직의 비서직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데서 비롯한다. 보좌하는 상사 외 직원들은 상사와 비서 당사자를 동일시하며 교류를 기피한다. 개인실 등에서 홀로 근무하는 환경은 비서 당사자를 더욱 타직원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러한 현상은 결과적으로 부당한 요구에 대한 해결 의지를 꺾는다.

B씨는 비서로 근무하던 당시 신고를 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부당한 일들은 ‘비서니까’로 합리화됐다”고 말했다. 이어 “역시 ○○실에는 화사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조직에서, 심지어 문제행동을 하는 사람이 수장인 곳에서 누구에게 문제를 알릴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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