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한진중공업 복직투쟁에 나선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용접공으로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필요성 절실히 느껴
앞서 먼저 간 동지들을 보며 노동운동을 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소임이라고 생각
이번 복직투쟁이 자신 인생의 마지막 싸움이길 바라

신지예 여성신문 젠더폴리틱스 연구소장이 우리 시대 인물들과 티타임을 갖는다. 여성신문 온라인과 지면을 통해서 연재한다.
지치고 피곤할 때 마시는 한 잔의 차가 마음을 위로하는 것처럼, 읽는 이에게 따뜻하고 기분좋은 이야기로 다가갈 수 있기를.

ⓒ여성신문
ⓒ여성신문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2003년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라디오 프로그램 오프닝에서 한진 중공업 사태를 전하며 꺼낸 말이다.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처럼 목숨을 걸며 크레인 고공농성을 이어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운동은 대한민국 노동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김진숙은 1981년 박창수 열사와 함께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에 입사했다. 1986년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고 어용 노조를 폭로하는 유인물을 배포한 뒤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해고됐다. 2011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를 저지하기 위해 김진숙 지도 위원은 목숨을 걸고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투쟁을 했다.

'도시락 거부 투쟁’, ‘어용노조 사건’ ‘크레인 고공농성’ 등 35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진숙 지도는 숱한 노동운동 현장의 주제자이자 목격자였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올해로 환갑이 된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 6월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는 마지막 투쟁을 시작했다.

지난 6월 23일 복직 촉구 기자회견을 마치고 참석자와 인사를 나누는 김진숙
지난 6월 23일 복직 촉구 기자회견을 마치고 참석자와 인사를 나누는 김진숙 ⓒ신지예

 

- 복직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노조 사무실을 찾으셨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저는 2003년 고 김주익 위원장이 크레인에 매달려 있을 때에도 공장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김주익 위원장이 129일, 제가 309일 투쟁했던 제 85호 크레인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허공에 떠있던 저는 85호 크레인의 자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지 못했죠. 저한테 공장 현장은 기억에 힘입어 더듬거려야 하는 오래전 고향이에요.

기억 속 공장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의 일상이예요. 쉬는 시간마다 크레인이 다니는 레일을 경계삼아 족구하던 사람들의 함성, 공장 밖 제일 따뜻한 햇볕이 내리던 곳에 전선 위 쪼로록 앉아있는 참새들 마냥 앉아서 언발을 녹이던 아저씨들과 그 옆에 널린 말라붙은 피가 있던 양말들. 점심이라고 나온 새카만 깡보리 도시락. 점심 때마다 남편 먹이려고 머리에 오봉 밥을 이고오시던 부인들의 얼굴. 부실한 회사 밥에 얼마나 한이 맺혔냐면,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싸움이 도시락 거부 투쟁이었어요. 4일동안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시락 거부 투쟁을 해서 사내 식당을 얻어냈죠.

또 눈을 감아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박창수, 최강서, 재규형, 김주익. 다들 얼마나 살고 싶었겠어요. 김주익 위원장은 죽기 전 유서를 3번 썼어요. 첫 유서를 쓰고 한달 뒤에 두번째 유서를 쓰고, 십일 뒤에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세번째 유서를 쓰고. 유서를 세 번이나 쓰는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머릿속이 아득해져요. 그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유서를 쓰는 맘과 살고 싶은 맘이 요동치는 사람이 바라보던 하늘은 어땠을까. 이 나이를 먹고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두고 못가는 것 같아요.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할 수가 없는 거니까.”

2011년 12월 15일 사측이 경영 악화를 이유로 내세워 400명의 정리해고안을 발표하면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시작됐다. 노동계는 경영상의 악화 책임을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돌리고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35미터 높이의 하늘, 85호 크레인 위로 걸어 올라갔다. 한국 노동운동이 잊지 못할 이름, 김주익 열사가 8년 전 129일의 투쟁 끝에 스스로 삶을 끝낸 그 크레인에 또 한 사람의 절실한 마음이 걸려 바람에 날렸다.

309일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오는 김진숙 지도의원. 2011.11.10
309일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오는 김진숙 지도의원. 2011.11.10 ⓒ뉴시스 여성신문

 

- ‘김진숙’ 복직투쟁을 시작하셨어요.

“2011년도 정리해고 투쟁 당시 저는 저의 복직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내 복직을 주장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해고된 다른 조합원들의 복직이 너무도 절박했기 때문이에요. 2003년 김주익 위원장, 박재규 조합원이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해고됐던 사람들이 복직되었는데, 저는 안됐습니다. 정문을 경계로 복직된 사람들은 들어가고 나는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당시 투쟁에서 저의 복직문제는 제가 요구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가 지금 제 복직만 주장하는 일이 많이 민망합니다.(웃음)"
 

- 김지도님의 남다른 삶으로 가족들이 걱정이 많으실 것 같아요.

“저희 집은 가족사가 복잡해요. 어렸을 때 제일 싫은 게 아버지 닮았단 소리였어요. 저희 아버지는 오로지 아들 밖에 모르고 산 전형적인 가부장이거든요. 아버지는 황해도 분이신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북한에서 생산된 전구를 지게에 이고 와서 남한에 파시는 일을 하셨어요. 그런데 어느날 38선이 생겨서 못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는 항상 명절만 되면 술먹고 울었는데 제가 해고되고 나서야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요. 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던 거구나.

돌아보면 그래요. 저는 가족에게 해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매일 그러셨죠. 남들은 자식이 승진이니 결혼이니 집 샀다고 자랑하는데 너는 매일 출두 명령서랑 구속통지서만 날라오고 남부끄러워서 못 살겠다고. 큰 언니는 저보다 12살이 많아요. 매일 인터넷으로 김진숙부터 검색해 본대요. 얘가 무슨 일이 있는지 없는지 저에게서부터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먼저 아는거죠. 제가 암투병을 할 때도 큰 언니가 전화와서 울면서 왜 말하지 않았냐고 묻더라고요. “너는 식구도 없는 사람처럼 왜그러니.”하면서. 제 성격 탓인지 가족들이 걱정을 해줘도 제가 먼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못하겠더라고요.

21살 때 한진 중공업에 입사하고 나서 노동운동 영역 안에서의 일이 너무 많았어요. 매일 사람들이 다치고 또 부당하게 해고되고. 노동운동하다가 맞는 일이 일상이고, 감방 가고, 수배생활하느라 화목한 가족이라는 건 제 삶에 닿을 수 있는 부분이 없었어요. 결혼도, 연애도 안했어요. 하지만 전 그렇게 살아온 제 지난 시간이 좋아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노동운동 할 거에요. 제 또래의 여성이 어디가서 이렇게 살 수 있겠어요. 어디가서 일하면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여자라고 비정규직으로 하대 받겠죠. 노동운동은 저에게 저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어요.”

- 주변에서 김지도님을 아는 분들일수록 물으실 것 같아요. 그 긴 투쟁의 시간, 어떻게 그렇게 사세요?

“그런 질문 많이 받아요. 크게 세 분류인 것 같은데요. 우리 큰 언니처럼 왜 아직도 그러고 사냐고 걱정하는 사람. 평범하게 사는게 그렇게 힘드냐구 묻곤 하죠. 그리고 두 번째는 옛날 동지들. 전업주부로 사는 친구도 있지만, 옛날 간호사했던 친구들은 연차들이 굉장히 오래되서 직급이 높거든요. 그 친구들은 저를 있는 그대로 봐줘요. 저는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친구인거죠. 세 번째는 잘나가는 사람들이예요. 관료가 되거나 어디 사장이 되거나 청와대로 간 분들은 ‘의장님은 아직도 여전하시네요’라고 말하죠.

저는 제 삶이 그냥 좋아요. 몇 차례나 곁에 있는 사람이 죽는 걸 봐온 사람이잖아요. 노동운동 하다가 필요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스스로 절박하게 생각했어요. 박창수와 제가 죽음에서 엇갈렸던 이유도 박창수가 그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에요. 간발의 차이죠. 가끔 생각해요.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주익씨가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저기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저는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소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1984년 용접공 김진숙
1984년 용접공 김진숙 ⓒ김진숙 제공

 

- 대한민국 최초 여성 용접공이세요.

“자격증을 갖고 있는 걸로 치면 그래요.(웃음) 조선소 일이 밖에서 보는 것보다도 정말 힘들어요. 입사했을 때 제 몸무게가 64kg이었는데 40kg 홀더와 장비를 들고 일하러 출근했어요. 수십미터 짜리 사다리를 타고 중장비를 다루며 일해야 하니까 몸을 많이 썼죠. 그런데 그런 거보다 더 힘든게 아저씨들의 음담패설이었어요. 지금이라면 다 미투죠 뭐(웃음).

제가 한진에 들어와서 아저씨들에게 제일 먼저 받은 질문이 이거예요.
“진숙아, 내는 구멍이 아홉갠데 니는 멫개고? 우리 세알리보까?”
아저씨들의 그런 음담패설 듣기 싫어서 땅에 떨어진 담배 필터를 귀에 우겨넣어 귀마개로 쓸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보니 저도 아저씨들의 태도에 물들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그런걸 학습했던 것 같아요. 그걸 넘어서기 위해 더 쎄게 높은 수위로 농담하기도 했고요. 연설할 때도 음담패설을 섞어서 연설하고요. 그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이후 트위터를 통해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당시 현장에서 그런 아저씨들의 문화와 싸웠다면 진작에 밟혀서 나갔을 거에요. 5천명 중에 미혼여성이 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때 남성노동자들은 월급을 타면 다들 집장촌으로 갔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이 당시 남성 노동자 문화였죠. 그렇지만 노동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이나, 두 운동의 기본이념은 평등이잖아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없는 평등, 여성과 남성의 차별없는 평등이요. 이런 문화는 변해야 할 문화이고, 바뀌고 있다고 전 믿어요.”

 

- 노동 현장에서 남성 중심 문화가 바뀌고 있음을 어떻게 실감하세요?

“예전 어느 노조 투쟁 때 남성 노조 간부들이 “여자와 담요는 새거일 수록 좋다”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요. 여성들이 주변에 있는데도 말이죠. 듣는 여성으로서는 기분이 나쁜데 명확하게 말할 수 없을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이제 '그런 여성 차별적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다들 하는 것 같아요. 자기들끼리 말하고도 “어, 내가 말 잘못했나?”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의 생각을 제일 크게 변화시킨 것이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가장 놀라웠던 장면이 2011년 희망버스 때의 퀴어버스였어요. 우리 조합원 몇몇은 퀴어를 ‘호모새끼’라고 비하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퀴어단체에서 운동 현장에 와주고 그들이 직접 자보를 만들어주고 또 연대해주는 것을 보면서 시야가 확 열린 거예요. 
당시 우리 노조 조합원 중에서 딸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대요. "아빠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좋은 것 같아" 그래서 우리 조합원이 "사람은 멋있는 사람에게 끌리게 되어있어." 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일인데 그렇게 사람들이 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운동에서의 연대가 그래서 중요한 것 같아요. ”

6월 23일 여성신문사와 인터뷰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6월 23일 여성신문사와 인터뷰 중인 김진숙 지도위원 ⓒ여성영상집단 움 제공

 

- 건강이 많이 안좋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몸은 좀 어떠신가요?

“제가 투쟁 이후 암에 걸렸거든요. 
아프기 전에는 제주도 가서 책방하고 싶었어요. 만춘서점, 소심한 책방처럼. 그런데 아프니까 인생이 확 흔들리더라고요. 우선은 하루하루 사는게 힘들었어요. 암 수술하기 전까지는 몸무게가 44kg까지 빠졌어요. 제가 제 몸을 의지대로 못했던 경험을 예전에 감방과 대공분실에서 겪었어요. 양손 양발이 뒤로 묶여서 입에까지 재갈이 물려있었죠. 암도 그런 기분이었어요. 제가 제 몸을 마음대로 못 가눴죠. 하루종일 토하고. 나중에는 화장실 변기 밖으로 피가 막 튀고. 우울했어요. 아,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나 싶더라고요. 항암을 하면 머리가 빠지잖아요. 그런데 저는 열흘이 지나도 머리가 안빠지는 거예요. 나는 의지가 강해서 머리도 쉽게 안빠지나 보다. 그런데 그날 목욕을 하려고 머리에 샤워기를 갖다가 댔는 머리가 후두둑 빠지는 거예요. 두 시간 동안 머리카락이 골룸처럼 빠지더라고요. 그렇게 머리카락 빠지는것도 속상하고, 또 누가 내 걱정하는 것도 싫고, 그런데 또 걱정 안해주면 서운하고. 그 때는 그랬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구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해고자 복직’을 위해 농성 중인 박문진 노동자와 연대하려고 부산에서 대구까지 걸었거든요. 그러면서 용기를 얻었어요. 원래는 저 혼자 걸어가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점점 함께 같이 걷더라고요. 제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제 곁 함께 서서 걷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알았던 동지들이 정말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다시 느끼게 됐어요. 제가 예전보다는 약해졌더라도 사람들과 함께라면 계속 운동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암이라는 병이 수술하거나 치료한다고 한번에 없어지는 병이 아니니까. 그래도 꾸준히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암이 아니었더라면 진작 복직투쟁에 나섰을텐데. 그렇지만 들어가서 다시 용접하려면 열심히 몸을 만들어야지 하면서 힘내고 있어요.”

- 복직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6시 30분에 통근 버스 첫차가 오거든요. 한진지회와 금속노조 부양지부는 매일 아침 선전전을 하고 저는 몸이 좋지 않아 화, 목요일만 선전전에 나서요. 두 세달 전에 사측과 먼저 교섭을 먼저 했었을 때 사측의 태도는 이제 와서 복직할라는 의도가 뭐냐면서 절대불가하다고 했거든요. 사측의 태도변화가 없으면 투쟁의 수위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한진중공업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예요. 이런저런 소문만 들리지 적격자가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 이어 사측에서 희망퇴직을 받겠다고 알려왔어요. 관리직부터 시작한다고 하지만 현장에 여파가 미치지 않을까 우려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복직 투쟁을 하면서 계속 주시하며 보려고 합니다.”

지난 6월 25일 김진숙 복직을 위한 첫 출근투쟁 사진
지난 6월 25일 김진숙 복직을 위한 첫 출근투쟁 사진 ⓒ여성영상집단 움 제공

 

- 투쟁을 시켜보고 계시는 시민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지요.

“희망버스가 어느덧 10년이 됐어요. 그 때 많은 분들께 걱정을 끼치고 또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병 들었을 때도 굳이 그 소식을 숨겼던 게 김진숙이라는 사람이 항상 걱정만 안기는 사람이 될까봐 그랬던 거예요. 저는 이 싸움이 제 인생의 마지막 싸움이었으면 좋겠어요. 복직해서 월급도 받고, 환갑날은 환갑잔치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노동운동, 여성운동하는 동지들과 만나면 뜨거운 국밥 한 그릇 사먹고요.

저는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세상을 바꿔왔다고 생각해요. 큰 덩어리들은 물색없는 소리만 칠 줄 알지, 실제로 하는 것이 없거든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것들이 많이 모이고 서로 연대하는 힘만이 기어코 세상을 바꾸더라고요. 그렇게 우리가 함께 모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내면 좋겠어요.”

자기 인생을 바쳐 헌신한 노동운동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꿈이 그렇게 큰 꿈일까?

1987년 7월 투쟁 이후 노동조합 위원장 선출을 위한 직접 선거를 쟁취하고 노동자들은 함께 모여 덩실덩실 춤을 췄다.
32살의 곽재규, 27살의 김진숙과 박창수, 25살의 박성호, 24살의 김주익 모두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하며 춤췄다.

2020년 환갑이 된 김진숙이 일터로 돌아가 “와 이리 좋노” 하고 춤추는 모습을 나는 꼭 보고 싶다. 그의 몸만한 꽃다발을 들고 웃으며 찾아가 국밥 한 그릇 얻어먹고 싶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