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권리보장법, 21대 국회에선 제정돼야”

2019년 11월22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문화예술노동연대·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여성문화예술연합 등 문화예술인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예술인권리보장법 처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화예술노동연대
2019년 11월22일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문화예술노동연대·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여성문화예술연합 등 문화예술인단체들이 국회 앞에서 예술인권리보장법 처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화예술노동연대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사라졌던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최근 다시 발의됐다. 문화예술인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이 법안이 이번에는 꼭 제정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예술인권리보장법은 문재인 정부 대선 공약과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100대 과제’에도 포함됐으나, 아직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기도 하다.

최근 미술계 내 성희롱 사건은 문화예술인들이 여전히 성폭력·성차별에 있어 현행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줬다. 2016년 ‘#OO_내_성폭력’ 운동부터 미투(#MeToo) 운동까지,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이 나올 때마다 제기된 문제다. 이제라도 국회가 응답해야 한다고 여성 예술인들은 입을 모았다.

 

문화예술인 70%는 프리랜서·계약직
여전히 성폭력 대책 사각지대에
최근 미술계 성희롱 공개 고발에도
관련 기관들 “조사·징계 권한 없다” 팔짱만
취약한 문화예술인 지위 개선 요구 ↑
게임업계 등은 현행법상 ‘문화예술인’ 인정도 못받아

‘미술계 Y 성희롱 사건’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메시지 ⓒSNS 캡처
최근 피해자의 고발로 알려진 ‘미술계 Y 성희롱 사건’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메시지 ⓒSNS 캡처

최근 미술계 내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예술인 권리 보호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또 나왔다. 피해자가 나서서 공개 고발한 사건이지만, 진상조사나 공식 조처 없이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지난달 경향신문은 서울문화재단의 한 사업 기획·운영감독인 Y작가가 사업 과정에 참여한 20대 예술인을 성희롱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사건을 조사하고 피해자를 지원해야 할 서울문화재단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별 움직임이 없었다. “권한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사건 대응에 나선 ‘미술계 Y 성희롱 사건 해결을 위한 대책위’에 따르면, 서울문화재단은 “성폭력 사건이 계약 기간 내에 발생했더라도 가해자와의 계약 기간이 종료돼 권한이 없다”며 가해자를 감독직에서 면하는 것으로 끝냈다. 피해자는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상담과 법률 자문을 받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프리랜서라 직장 내 성희롱 사건으로 다룰 수 없어 민사소송을 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현행 예술인복지법에는 이들 기관이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의 예술 활동을 제재하거나 정부 지원 취소 등 조처를 할 근거 조항이 없다. 기존 성폭력 방지정책은 공공기관·학교 등 조직 위주라, 프리랜서·계약직 문화예술계 노동자들까지 보호하지 못한다. 이번 사건 피해자가 법적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사건 공론화를 택한 배경이다.

Y작가는 지난달 1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올리고 “창작 활동 중단”을 밝혔다. 그러나 “가해자가 창작을 그만두는 것으로 예술계 성폭력의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사업 참여 예술인들은 지난달 21일 입장문을 내고 “피해자의 상황이 현재 활동하는 참여 예술인들의 일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에 공포를 느낀다. 재단의 명백한 입장 표명, 추가적인 피해 규명을 위한 재조사, 재발 방지 대책 확립이 이뤄지기 전까지 개관 프로젝트 진행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여성문화예술연합도 지난달 22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 사건은 문화예술계의 예비예술인이나 여성 작가들의 성희롱 피해를 구제하는 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현행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 종사자의 정의는 폭이 좁다. ⓒ웹사이트 화면 캡처
현행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 종사자의 정의는 폭이 좁다. ⓒ웹사이트 화면 캡처

현행법 자체가 다양한 문화예술계 종사자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예컨대 게임 개발에 참여한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음악가 등은 현행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 종사자로 인정받지조차 못한다. ‘문학, 미술(응용미술 포함), 음악, 무용, 연극, 영화, 연예, 국악, 사진, 건축, 어문, 출판 및 만화’만을 ‘문화예술’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8일 ‘사상 및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한 여성 작가 배제 관행 개선을 위한 의견표명’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문체부 장관에게 “문화예술진흥법 개정 추진을 검토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인권위 “게임업계 ‘페미니즘 검열’은 혐오·차별” www.womennews.co.kr/news/200637)

 

21대 국회서 다시 발의된 ‘예술인권리보장법’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1일 대표발의한 ‘예술인권리보장법’ ⓒ원문 캡처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1일 대표발의한 ‘예술인권리보장법’ ⓒ원문 캡처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이처럼 취약한 처지의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권리 침해 행위를 방지하고, 성평등한 노동 환경을 조성하며, 권리구제 사각지대에 놓인 예술인에게 실효성 있는 피해구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법이다. ‘예술인은 예술 활동에 있어 성별에 따른 차별 등이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문체부 장관이 성희롱·성폭력 사건 관련 직접 수사를 의뢰하고, 행정 처분·징계 요구 등을 할 수 있는 근거 조항도 있다. 또 정부 차원의 ‘예술인 성희롱·성폭력 방지 대책을 수립’하고, ‘2년마다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를 하고 결과를 발표’할 책무도 부과한다. 문화예술 단체와 문체부 등의 논의를 거쳐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여야 대립 속에서 방치됐다가 폐기됐다.

(관련기사▶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4년...개선 입법 물 건너가나 www.womennews.co.kr/news/199004)

지난달 1일 21대 국회 개원과 함께 ‘예술인권리보장법(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 보장을 위한 법률)’이 다시 발의됐다. 20대 국회에서 이 법을 발의했던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또 대표발의했다. 이제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아닌 외교통일위원회에 속한 김 의원이지만, “원안 발의자로서 끝까지 책임지고 싶고, 입법이 시급한 상황에서 원점으로 돌아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에 발의했다”고 김 의원실의 조태근 보좌관은 설명했다. 또 “8월 17일 입법 공청회를 열 계획”이라며, “20대 국회 때부터 여러 관계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보완해 만든 법안인 만큼 이번엔 꼭 통과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문체부, 문화예술공정위에 성희롱‧성폭력 전문가 선임키로
산하기관 32곳 성희롱·성폭력 대응체계 점검도
“주무 부처가 ‘입법 먼저’ 핑계로 늑장 대응” 비판도

예술인권리보장법이 다시 발의됐지만, 주무 부처인 문체부가 법안 통과만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될 노릇이다. 문체부는 우선 산하 문화예술공정위원회에 성희롱‧성폭력 전문가들을 추가로 선임하기로 했다. 7~8월 내로 변호사, 여성단체 인사 등 전문가 4명을 선임해, “성희롱으로 인한 불공정행위 조사와 시정조치”를 위한 도움을 받을 계획이다. 이달 4일 시행된 예술인복지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른 조처다.

이달 중순부터는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과 함께 문체부 산하기관 32곳의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절차와 운영 실태를 2개월에 걸쳐 일제 점검한다. 담당 부서인 문체부 양성평등정책담당관 관계자는 이번 점검을 통해 “실질적인 개선 방안을 도출해 각 기관의 성희롱·성폭력 사건 대응 능력과 예방·근절 분위기를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앞서 문체부 성희롱·성폭력 예방대책위원회는 2018~2019년 세 차례에 걸쳐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 이전에 예술인의 성희롱을 불공정행위로 규정하고 사건처리 시스템을 만들라”고 문체부 장관에 권고했다. 인권위도 지난 2월 문체부 장관에게 ‘문화예술 성희롱·성폭력 심의위원회’ 신설 등 대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지난달 22일 성명에서 “문체부는 법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핑계만 계속했다. 문체부가 진작 예방대책위와 인권위의 권고를 이행했다면 양 작가 성희롱 사건은 제도적 해결 절차를 밟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여성문화예술연합 회원들이 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카페 담 앞에서 예술계 성폭력 정부 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문화예술연합 회원들이 2018년 3월 7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카페 담 앞에서 예술계 성폭력 정부 대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예술인권리보장법은 ‘예술인고용보험법’(고용보험법 개정안)과 함께 문재인 정부 대선 공약과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 100대 과제’에 들었지만, 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다. 예술인 권리 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이 없는 데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재앙’까지 겹치면서 문화예술인들의 처지는 더욱더 취약해졌다. 현장에서는 많은 예술인들이 “국가에 배신당한 기분” “더는 기대도 없다”며 실망을 토로하고 있다고 한다.

오경미 문화예술노동연대 사무국장은 “그간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어렵게 발의됐다 폐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문화예술인들이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예술인권리보장법, 예술인고용보험법 등의 ‘당사자’인데도, 입법 과정에서 ‘당사자’가 아닌 ‘의견 수렴 대상자’로서 소환돼, 관료들에게 대상화되거나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또 “예술인권리보장법안 처벌 조항을 두고 문화예술계에서는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면서도, “그동안 어떤 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했던 예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어 현장의 세세한 목소리를 반영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도 “양철모 작가 성희롱 사건은 여전히 성희롱·성폭력 사각지대에 서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줬다”며 예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촉구했다. 또 “앞으로 입법 과정에서 현직 문화예술인만이 아니라 예비 문화예술인의 피해 사례가 많다는 점을 꼭 고려해야 한다. 성희롱·성폭력 사건 가해자 모두를 실질적으로 제재할 수 있도록 관련 조항도 더 보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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