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청 시민분향소에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지막 분향을 위해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홍수형 기자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분향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9일 비서를 성추행했다는 의혹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박 시장은 유서에서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고 했다. 고인은 ‘한국 시민운동의 상징’이고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였다.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의 공동 변호인이었고, 1993년 한국 최초의 직장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을 승소로 이끌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면서 서울시장 재임 시절엔 시장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조직해 여성인권 신장에 앞장섰다. 이런 공적을 지닌 고인이 성폭력 특례법 위반 혐의로 고소되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이상의 충격이었다.

박 시장을 고소한 전직 비서는 대리인을 통해 13일 기자회견에서 “박 시장의 성추행이 4년간 지속됐고, 서울시에 알렸지만 묵살됐다”고 전했다. 그는 “법정에서 그 분께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사과받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측은 ‘전형적인 권력·위력에 의한 성추행’으로 “박 시장의 사망으로 수사가 종결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 시장 조문을 둘러싸고 내 편은 무조건 감싸고 아니면 배척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또 한번 확인됐다.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그동안 강조했던 ‘피해자 중심주의’ ‘성 인지 감수성’은 이번 사건에서는 실종되었다. 고인을 추모·애도하는 목소리는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피해자와 관련해선 언급을 피하는 ‘선택적 침묵’이 이어졌다. 야당 성추문엔 맹공을 퍼부었던 여당이 당 소속 인사들의 미투 의혹이 불거졌을 때 대하는 태도가 정반대로 달라진 것은 표리부동이고 자기부정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적어도 한 개인의 죽음 앞에서는 잠시나마 갈등과 정쟁을 접는 최소한의 절제와 품격이 존재했다. 그런데 피해자 2차 가해와 고인에 대한 조롱이 도를 넘었다. 여하튼 우리 사회는 애도의 시간과 진실의 시간이 충돌하면서 극심한 혼돈과 분열을 겪었다.

공동장례위원장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3일 고인의 영결식장에서 “지금은 애도의 시간이다”며 “박원순이라는 타인에 대한 종합적 탐구나 국민으로서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애도가 끝난 뒤에나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고인의 업적만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다. 고인이 “죽음으로써 모든 걸 답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여기자협회는 12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피해 호소인 보호가 우선이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그러면서 “현행 법체계는 이번 의혹 사건에 공소권 없음을 결정했지만, 진상을 규명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면제한 것은 아니다. 법적 차원을 떠난 사회적 정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제 서울시와 정부·국회·정당이 진상 규명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지적처럼 “무엇보다 이 상황이 본인(피해자)의 책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신상 털기나 2차 가해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범죄 행위다. 미국 CNN 방송은 “한국 사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는 데다 최근 몇 년간 미투 운동에 나라가 흔들릴 정도였다”며 “정치인들은 이런 움직임에 취약하며 박 시장의 죽음은 한국 사회가 여성 혐오적 시선을 가진 남성의 문화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떤 이유에서든 극단적 선택은 미화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박 시장의 선택은 결코 존중될 수 없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무겁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져본다. 떳떳하지 못한 죽음을 진정 애도하는 길은 무엇일까? 사회에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인사들의 극단적 선택이 왜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가? 미투 이후에도 우리 사회에 왜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지속되는가? 사회 특권층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진솔한 대답이 박 시장 죽음 이후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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