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예의 W정치 인사이드]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라면서 살아있는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정치권
대한민국 국민들 장례기간 내내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두 눈으로 목격했다
우리의 일상을 구할 것은 우리 뿐이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을 만들고 용인한 공범, 가부장 정치를 끝장내자

586 가부장 정치의 몰락을 선언한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은 박원순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은 민주화 세력을 표방한 권력자들이 정치적으로 파산하는 도화선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명확해졌다. 지금 민주주의자와 페미니스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내부 성폭력을 용인하고 은폐해온 586 가부장 정치인들이다.

13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가 철거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3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차려진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가 철거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한국 여성들에게 지난 한 주는 견디기 힘든 모욕과 절망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는 자유의 몸이 됐고, 성범죄자 안희정의 모친상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와 함께 정권 실세들이 모여들어 의리를 과시했다. 경주시 트라이애슬론팀 최숙현 선수는 팀 내 폭력과 성폭력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구하라 씨를 폭행하고 협박한 최종범은 2심에서 불법촬영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자신의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박원순 시장은 피해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사과하고 자살했다.

박 시장의 죽음을 두고 보여준 민주당과 서울시의 대응은 애처로웠다. 그가 얼마나 서울시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는지 알아달라며 기자회견을 하고, 시청 앞 광장에 대형 분향소를 세우고, 온라인에는 헌화할 수 있는 페이지를 만들고, 거리에는 박 시장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추모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들은 망자에 대한 예의를 앞세워 박시장의 죽음을 미화하기에 급급했다. 피고소인의 죽음으로 공소권이 소멸됐으니 성폭력 사건에 실체적 사실이 있을 수 없다며, 박원순 시장에 대한 성폭력 의혹제시는 사자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취재 기자에게 보여준 태도는 이런 분위기의 절정이다. 집권 여당의 대표인 그는 박원순 시장 성폭력 사건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을 물어본 기자에게 'X레자식'이라고 호통쳤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면서 정작 살아있는 피해자와 시민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장례 기간 내내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민주당의 ‘위력’은 한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故 박원순 서울시장 추모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故 박원순 서울시장 추모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수사 상황의 유출은 심각한 문제다. 피해자가 고소장을 제출한 지 얼마 안 돼 그 사실이 박 시장에게 알려졌다. 다수의 언론 보도를 통해 유추되는 바는 피해자가 고소한 동시에 경찰이 이를 청와대에 보고하고 이것이 박원순 시장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시장에게 ‘피소사실을 미리 알 수 있는 특혜’ 따위는 없다. 어떤 경위로 박시장에게 수사상황이 유출된 것인지, 청와대 어디까지 이를 알았는지 밝혀져야 한다.

다른 문제는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서울시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은폐했을 가능성이다. 고소 전 피해자가 서울시청 내부에 도움과 부서변경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했다고 호소하는 것을 보아 조직적인 은폐시도가 있었을 수 있다. 『서울특별시 성희롱 예방지침』에 따라 서울특별시장이 ‘성폭력 행위자 무관용 원칙’ 을 수행해야 했으나 기관장이 그 행위자이니 지침에 따랐을리 만무하다. 조직적 은폐 의혹도 철저히 밝혀야 한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매우 정치적인 영역이다. 현 정권은 본인들이 움켜쥐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사용해 박시장을 미화했다. 전우용 역사학자를 비롯한 친민주당계 인사들은 공적 영역에서 박시장이 갖고 있는 위계권력에는 눈을 감고, 그저 그를 선한 개인으로만 회고했다. 박시장과의 사적 관계나 고리타분한 진영논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로 가득했다.

야권의 비판 목소리 또한 무뎠다. 박시장의 죽음 이후 미래통합당 내부에서는 의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며 역풍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류호정 의원의 박원순 조문 거부가 논란이 되자 대표로서 사과드린다며 입장을 밝혔다. 박 시장 사건에 대한 반응조차 이러니 일상에서 성폭력에 숨막히는 여성들의 처절한 삶이 바뀔 리 만무하다.

진보·민주화를 표방한 586 세대의 정치 권력자들의 한계를 이미 우리는 수없이 확인했다. 미투, 강남역, 00계 성폭력, 혜화역, n번방까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고, 현실에서는 거리로 뛰쳐나가면서도 지금의 정치권이 여성을 위해 움직일 것이라 희망을 걸었다. 사과하면 받아들이고, 대처하겠다는 말을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번번히 배신당했다.

왜 우리는 성범죄자에게 권력을 위임할 수 밖에 없는가? 시장에 오른 자가 성범죄자가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일상을 구할 것은 우리 뿐이다. 가부장 정치의 권력을 빼앗아 페미니즘 정치를 구현하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진보와 민주를 팔아 그들만의 왕국을 지속시키려는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한다.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5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세계 여성의 날인 2019년 3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35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시민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시민들 중 가장 역동적인 힘을 갖고 있는 집단은 페미니스트다. 수십만명이 모여 구호를 외친 대학로 집회도, 온라인에서의 치열한 싸움도 ‘아직까지는' 진정한 변화에 도착하지 못했지만, 기억하자. 역사는 행동하는 자의 것이고 꿈꾸는 자의 것이다.

우리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싸움 중 하나가 이제 막 시작됐다. 이 따위 정치판은 소멸되고 눈부신 평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길을 앞당기는데 페미니스트, 특히 10대, 20대, 30대의 역할이 중요하다. 586 가부장 정치의 사망을 선언하고 우리 페미니스트가 주체되는 정치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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