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폭행 민원 제기했으나
경주시체육회·철인3종협회·
대한체육회 등 5개 기관 외면
문체부도 사건 터질 때만 관심
복종·묵인이 폭력으로 이어져

가해자로 지목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감독 김 모씨와 선수들이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가해자로 지목된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김규봉 감독과 선수들이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고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참석해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뉴시스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유망주였던 고 최숙현(22) 선수가 ‘팀 닥터’와 동료 선수들의 가혹행위와 폭언, 괴롭힘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최 선수는 수 개월간 도움을 호소했지만 체육계와 관계 기관 모두 외면하거나 수수방관했다.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피해를 알렸는데도 그 누구도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체육계의 폐쇄적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최 선수 같은 피해자는 계속 나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스포츠·시민단체들은 최 선수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다”라고 지적했다.

최 선수는 김규봉 경주시청 감독, 팀 닥터라고 불리는 안주현 운동처방사, 선배 선수 2명의 가혹행위에 시달렸다.

최 선수와 그 가족은 지난 2월부터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대한철인3종협회, 경주시청,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지검 경주지청 등 5개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최 선수를 적극적으로 도운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관계 기관 간 정보 공유도 안됐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 자료를 보면 최 선수의 아버지는 지난 2월 6일 경주시청을 찾아가 가혹행위를 신고했다. 그런데 경주시 체육회는 지난 4월 경주경찰서가 자료를 요청했을 때야 사건을 인지했다. 3월에는 최 선수와 가족이 대구지방경찰청과 검찰청, 4월에는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6월 대한철인3종협회 등에 피해를 호소했다. 하지만 최 선수에게 ‘가해 혐의자가 처벌받고, 자신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준 기관은 없었다. 감독으로부터 ‘문제없다’는 얘기만 듣고 사건을 덮기도 했다.

최 선수가 가해자들로부터 당한 괴롭힘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이 일부 공개한 선수들의 진술서 내용을 보면 팀 닥터로 불리던 치료사 안주현씨는 최 선수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폭행·폭언 등 가혹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선수는 진술서에서 “안주현 선생님이 갑자기 자기 방으로 불러서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라며 뺨을 2차례 때렸다가 갑자기 또 웃으면서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고 예뻐했는데’라며 볼에 뽀뽀를 했다”고 적었다. 또 다른 선수는 “안주현과 치료, 보강훈련을 이유로 만났는데 훈련과정 중 수영 동작을 알려준다면서 서있는 상태에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한쪽 손으로 목을 감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본인 목을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끌어안을 때처럼 끌어 안으라’고 해서 굉장히 불쾌했다”고도 했다. 경북경찰청에 따르면 8일 기준 전·현직 선수 15명도 폭언이나 폭행 피해를 입었다고 진술했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와 ‘체육계 폭력근절안’을 만들고도 묵혀둔 국가인권위원회의 대응도 비판을 받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주문했다.

‘고 최숙현 선수의 마지막 요청에 답하기 위해 모인 단체’로 모인 다수의 시민단체는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철저한 진상 조사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독립성, 전문성, 신뢰성, 책임성이 보장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라”라고 요구했다.

지난해 인권위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에 따르면 실업 선수의 26%가 “신체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성적 지상주의와 복종 문화는 체육계 폭력 문제의 주 원인으로 꼽힌다. 감독이 선수의 이른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가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을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준형 젊은 빙상인연대 대표는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훈련관리지침에 ‘선수촌 내·외 생활과 훈련 중 지도자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한다’라는 문구가 있다”고 선수 인권보다 지도자 권위를 체육계 중시하는 분위기를 지적했다. 지난해 선수 성폭행으로 복역 중인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 사건이 드러나자 복종 규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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