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사회주의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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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활동하는 여자단톄5-조선여셩동우회’, 〈조선일보〉1925.12.21

1922년 조선 민사령(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적용됐던 민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기본법규) 개정 이후 재판상 이혼청구권을 부여해 어느 정도 여성의 법적 지위가 개선됐다. 하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여전히 남편에게 예속돼 있어 재판상 이혼청구권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이런 관점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여성의 법적, 사회적 위상의 개선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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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무산부인데이 기념대강연회:여성동우회와 여자청년동맹’, 〈동아일보〉1927.3.5▶

“부인의 해방은 결국 경제적 독립에 있다. 자본주의 경제조직 하에서는 경제적 독립을 기대하기 절대 불가능하다. …부인해방운동은 무산계급 해방운동과 같이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조직을 사회주의 경제조직으로 변혁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 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를 점진적 개량주의적 여성운동이라고 하면 여성동우회는 급진적 혁명적 부인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자가 사회에 범람하는 악한 결과를 보고 자선사업과 같은 방법으로 구하든지 개량하려고 하는 반면에, 후자는 악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사회제도에서 찾아내어 그 제도의 개혁에 치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신덕, ‘조선부인운동의 過去 現在及將來’, 〈朝鮮及朝鮮民族〉제1집, 조선사상통신사, 1927년)”

위 글은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경제적인 독립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성이 단순한 의식계몽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성자신의 직업권과 노동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우파지향의 교육, 문화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당시 식민지 사회구조에 초점을 맞춰 사회변혁적인 계급운동에 주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은 러시아, 일본 등에서 영향을 받아 신분의 평등과 계급해방에 기반을 두고 반상제도(지배계층인 양반과 피지배계층인 상인으로 나눠 부르는 데서 붙여짐.), 노비제도, 남녀불평등문제, 직업 및 교육기회의 차별과 같은 온갖 종류의 사회적 모순의 철폐를 주장했다. 여성들이 집안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간에 다양한 형태로 참여하면서 겪었던 불합리한 현실과 절대다수가 가난하고 척박했던 식민지 조선의 여건에서 사회주의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조선여성은 국가, 계급, 성의 삼중고”

조선여성동우회, 여성의 사회적 해방론 제창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위한 기본전제로서 경제적 독립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고 여성 노동문제에 주목했다. 그들은 여성운동이 일부 부르주아 인텔리 계층에 국한돼서는 안되고 노동자, 농민 등 민중여성을 포함한 전조선의 여성운동이 돼야 한다고 봤다. 나아가 여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일시하면서 운동의 주체를 여성노동자로 상정하고 여직공들의 파업과 노동쟁의를 지원하는 것을 주된 활동방향으로 잡았다. 1923~24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확대되던 사회분위기를 반영해 여성계도 무산계급여성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선의 녀성은 삼중의 압박을 받고 있는 셈일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조선의 녀성은 부르조아 가정에 태어낫거나 혹은 푸르레타리아 가정에 태어낫거나를 물론하고 모드다 남자에게 압박을 당하고 경제권을 빼앗기고 남자에게 붙매어 잇게된 까닭에의다. 그러므로 인류사회에 계급을 가린다면 맑쓰가 말한 것과 같이 양대계급 뿐만 아니외다. 그러므로 가정에 잇는 녀성은 자기를 압박하는 남편과 동등하여야 할 것 입니다. (정래동, ‘닥치는 대로 하지오’, 〈신가정〉, 연도미상)”

이처럼 사회주의 여성해방론은 여성문제가 역사상 경제제도의 변화와 연관돼 있고 식민지시대 조선여성의 삶은 국가, 계급, 성에 따른 삼중고의 성격을 지닌다고 봤다. 단지 제도적인 차원의 개혁만이 아니라 여성이 계급의식을 갖는 것과 경제권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남녀동등과 여권획득을 해결하는 기본 열쇠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사회주의 여성단체였다. 정종명, 주세죽, 허정숙, 정칠성 등이 발기인이 돼 조직한 ‘조선여성동우회’는 당시 여성들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했다. ‘조선여성동우회’선언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여성의 경제적, 성적 자유 및 인간적 평등권을 강조했다. 즉 여성의 사회적 해방론을 제창하며 남녀간의 형식적인 평등을 넘어서 여성도 남자중심의 사회경제 질서에 균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으로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권리 없는 의무만을 지켜오던 여성대중도 인류역사의 발달을 따라 어느 때까지든지 그와 같은 굴욕과 학대만을 감수하고 있을 수는 도저히 없게 되었다. 우리도 사람이다.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으며 권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다. 우리는 성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남성의 압박·노예가 되고 말았다. 아! 우리도 살아야 하겠다. 우리도 잃었던 온갖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하겠다. (조선여성동우회 창립선언, 1924년 5월 23일)”

이렇듯 ‘조선여성동우회’는 기존 여성단체들이 부르주아적 계몽운동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침체돼 갈 즈음 여성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역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민중여성을 포함하고 당시 사회경제구조에서 착취를 당하던 저소득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새로운 형태의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보다 구체적인 여성해방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조선여자동우회’가 조직된 때는 사회주의 운동이 고조되면서 ‘조선노동총동맹’,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던 시기였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조선여성동우회’는 지식인 계층의 교육, 사회사업, 종교, 문화활동 중심의 여성운동의 성격을 지양하고 보다 거시적인 사회구조적 차원으로 여성운동을 끌어올려 민중여성의 생존권 투쟁과 여성의 경제적 독립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24년 창립돼 1927년 해체하기까지 ‘조선여성동우회’는 각 지방에 40여 개의 여자 청년회를 조직했고, 순회강연과 토론·강좌 등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정신을 소개했다. 또한 여직공들의 파업을 조종하고 노동부인을 위한 위안음악회를 개최하는 한편 사회주의 적화운동을 추진했다. 도시, 지방, 농촌을 막론하고 청년여성, 가정부인, 노동부인, 직업부인, 무산여성, 공창여성, 여학생 등 전체 조선여성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여성운동을 펼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무산계급운동을 추진하려는 급진세력과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이 충돌하면서 주도권 장악을 위한 세력투쟁으로 계열간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신생단체들로 흡수, 해체됐다.

‘조선여성동우회’가 창립된 지 80여년이 흐른 현재에도 여성들의 경우 실질적인 경제적 권리를 유보 당하거나 노동현장에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해 내는 산업예비군과 같은 위치임을 고려해 볼 때, ‘조선여성동우회’의 관점은 여전히 새롭고 여성운동사의 커다란 흐름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한국여성 근·현대사〉내용을 새로 쓴 것이다.

신희선/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공동연구원, 숙명여대 의사소통능력개발센터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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