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공간에서 친밀감 쌓고
성착취하는 '온라인 그루밍'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등
온라인 그루밍 처벌 법제화
21대 국회서 첫 법안 발의
중학생 11% "누군가 성적 접근해"
가해자들, 아동과 온라인 대화
8분만에 정서적 유대 형성
의제강간 연령 상향 16살로 상향
전문가들 "강간죄 기본 요건부터 다시 봐야"

조주빈(24) 등 일명 N번방 사건 주동자들은 자신을 속이고서 아동·청소년 등에 접근해 성착취했다.  ⓒ여성신문
조주빈(24) 등 일명 N번방 사건 주동자들은 자신을 속이고서 아동·청소년 등에 접근해 성착취했다. ⓒ여성신문

 

N번방 사건은 그동안 우리사회가 백안시했던 디지털 성폭력이 발전하는 기술의 힘을 입고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줬다. 디지털 성폭력의 주요한 피해자들은 온라인 공간이 일상생활의 한 부분인 10대와 20대들이었다. 성착취 가해자들이 청소년을 주요한 타깃으로 노린 것을 두고 국회는 뒤늦게 뗌질에 나섰다. 11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온라인 그루밍’ 처벌법을 발의했다. 지난 4월 국회는 기존 의제강간의 기준연령인 만13세를 만16세로 높이는 형법 개정안을 통과했다.

여성가족부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과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실시한 ‘2019년 성매매 실태조사’ 결과, 전국 중·고생 6423명 가운데 111.1%가 지난 3년간 ‘온라인 그루밍’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만남을 유도하는 것까지 경험한 비율은 2.7%였다. ‘성적 유인’을 경험하는 주요 경로는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메신저 등 인스턴트 메신저(28.1%)와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27.8%)가 가장 많았고, 인터넷 게임(14.3%)이 뒤를 이었다.
 

 

△“우리 비밀친구 할래?” 온라인 그루밍의 늪

‘온라인 그루밍 성폭력‘은 온라인상에서 성착취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의 환심을 사거나 유인하는 행위를 뜻한다. 좁게는 직접적으로 미성년자와 성적 대화를 하고 성행위를 권유하는 것부터 넓게는 성적 사진과 영상을 올리도록 응원하는 행위까지도 ’온라인 그루밍 성폭력‘에 속한다.

국제실종및착취아동센터가 발표한 ‘성적목적의 아동 온라인 그루밍:모델법 및 외국 법제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불과 30분 만에 만남을 위해 아동·청소년을 설득할 수 있다. 영국 미들섹스 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온라인에서 아동들과 채팅을 할 때 불과 3분 만에 성적인 주제를 꺼내며 8분 만에 아동과 유대를 형성했다.

온라인 그루밍 성폭력은 반드시 성적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공분을 일으킨 N번방 사건에서 성착취 가해자들은 직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피해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착취 영상과 사진을 찍어 보내게 했다. 온라인 공간이기 때문에 위장도 쉽고 새로운 성착취 무대를 찾는 것도 쉽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호감을 얻기 위해 동성으로, 또래로, 유명인으로 위장하고 정체를 들키면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로 이동한다.

지난 2017년 10월 영국에서 검거된 아동 성착취범 메튜 폴더(Matthew Falder)는 온라인 공간에서 예술가 여성으로 행세했다. 그는 70여개의 아이디를 가지고 있었으며 피해자의 호감을 산 뒤 그림을 핑계로 노출 사진을 보내게 해 협박 수단으로 삼았다. 300명의 피해자가 밝혀졌으며 10년에 걸쳐 성착취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메튜 폴더 사례에서 피해자를 실제로 만나 강간한 경우는 발견되지 않았다.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지난해 9월 2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 10차 페미시국광장 '강간죄를 위한 총귈기'가 열렸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의제강간 연령 상향... 성적 주체로서의 권리가 우선돼야

의제강간이란 강간죄가 규정하는 조건인 협박 또는 폭행이 없어서도 기준 나이의 상대와 성적 행위를 할 경우 무조건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이다. 형법 개정안이 4월 통과되기 전 의제강간 기준 연령은 만13세였으나 현재는 만16세가 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4일 서울 마포구 성폭력상담소에서 연 의제강간 관련 집담회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동의’를 골자로 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우선됐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대표는 피해자가 어떠한 자율적 권리를 침해 당했는지를 살피기 보다는 현재 우리 법은 가해자를 중심으로 어떤 행위를 금지할 것인지만 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법관점이 결과적으로 보편적인 성적 권리를 인정하지 못 하는 토대가 된다는 취지다.

의제강간 연령이 보호해주지 않는 연령대에 대한 우려도 크다. 권현정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의제강간 연령 밖의 청소년이라면 성적 행동을 해도 괜찮다는 그런 메시지를 주는 게 아닌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공동대표는 “만13세 몇 개월이어서 의제강간으로 처벌하지 못한 사례가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불렀다. 그러나 앞으로는 만16세 몇 개월의 사례가 나올 것이다. 계속 연령을 높여간다고 지금의 문제들이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우리 법은 성인이 되는 연령을 만18세로 본다. 만18세가 되는 해부터 친권자 동의 없는 혼인 등이 가능해진다. 청소년의 아르바이트는 만15세부터 가능하지만 만17세 이하의 경우 친권자 등의 동의를 받은 취직인허증이 필요하다. 친권자 없이 온전한 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연령과 의제강간 기준연령이 보호하는 연령의 차이를 두고서도 비판이 인다. 양 공동대표는 “청소년이 성인과 관계에서 갖는 취약성은 비대칭적인 자원에서 오고 이는 사회문화적인 환경 탓”이라고 지적한다. 청소년이 상대적으로 폭력 등을 겪었을 때 자신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원과 권리가 보장되지 못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 부소장은 “의제강간 연령 기준의 상향은 그루밍 성폭력 등에 대한 단죄를 쉽게 한다”고 본다. 그루밍 성폭력이 갖는 특성상 피해자는 ‘동의’를 하지만 온전히 주체적인 권리를 행사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권 부소장은 성인과 청소년 간의 경제적 격차나 주어진 정보 등이 모두 동등할 수가 없는 만큼 의제강간 연령의 설정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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