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위주 교육, 법관자질 검증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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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을 거친 법조인과 여성학자들은 연수원의 보수적인 문화와 교육을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사진·민원기 기자>

여성, 인권 강의 선택사항성평등 인식 법 집행으로

법조인 성평등교육 시켜야

전화미팅으로 알게 된 여성을 협박, 성폭행하고 음란사진까지 찍는 등 엽기행각을 벌여온 사법연수원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법학이론과 법기능만을 암기하고 성적만 좋으면 법관이 될 수 있는 연수원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예비 법조인 성폭행·협박 사건

전화미팅으로 알게 된 여성을 협박, 성폭행하고 음란사진까지 찍는 등 엽기행각을 벌여온 사법연수원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특히 자신의 이름과 직업 등 신원을 전혀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를 수년동안 집요하게 괴롭힌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를 한 사법연수생의 개인적인 문제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법조인에 대해 검증과정 없이 시험성적 중심의 법조인 양상에 경종을 울렸다는 지적이다. 특히 사법연수원을 거쳤던 법조인들은 ‘창피하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법의 기능만을 주입하는 폐쇄적인 사법연수원 교육과정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여성, 인권관련 과목이 선택과목이거나 특별강의가 대부분인 현 연수원 교육은 성평등한 법 집행자로서의 자질을 교육하는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따르면 지난해 4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A(31)씨는 95년 군복무를 하면서 전화를 통해 알게 된 B(27)씨와 음란통화를 해 오다 98년 “녹음한 통화내용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B씨는 유학을 간다며 자신의 연락처를 여러 번 바꿨으나 A씨는 집요하게 B씨를 찾아내 협박을 일삼았다.

지난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A씨는 사치스런 생활로 돈이 궁해지자 지난해 1월 B씨에게 음란통화 녹음테이프를 사든지 아니면 더 만나 줄 것을 강요했다. A씨는 B씨의 신용카드를 뺏은 후 변태 성행위를 시키는 등 성폭행하고 이를 촬영했다.

A씨는 B씨의 신용카드로 약 3000만원을 사용하고 최근 결혼한 B씨에게 남편에게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예비법조인이 된 후에도 엽기행각을 계속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참다못한 B씨의 신고로 A씨는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A씨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강도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이송희 간사는 “그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공부만 열심히 해서 법조인 대열에 들어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그가 만약 판사로 임용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고 말했다.

여성연수생들 ‘동화 아니면 단절’

사법시험-사법연수원-법관·검사 임용이 공식인 현행 법조인 양성제도는 한국에만 존재하고 있는 제도. 작년까지 한국과 함께 획일적인 법조인 양성제도를 갖고 있던 일본은 올 들어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미국식 로스쿨을 도입키로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로스쿨 등 제도 자체를 논하기 전에 현재 사법연수원의 보수적인 문화와 교육을 바꾸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전문적인 교육과정과 자질보다는 고시생의 시험성적으로 선발하는 시스템으로는 성평등한 법률 서비스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라는 것.

특히 사법연수원 수료 성적순위가 법원 배치, 근무지, 지방법원 부장판사 승진 시기까지 작용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것으로 성평등 의식은 사치스런 고민이라는 것이다.

현재 사법연수원의 연수생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3기가 976명 중 171명(17.52%)이며, 34기가 972명 중 230명(23.66%)이다. 평균 20%를 차지하는 여성 예비법조인이 연수를 하고 있지만 이들은 가부장적인 사법연수원 문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용히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변호사 ㄴ씨는 “사법연수원을 다닐 당시 여성 연수생이 10여명 정도 됐는데 한조로 배치하지 않고 남자 연수생과 섞어 한 조에 한명꼴로 배치됐다”며 “누구를 위한 편성인가에 논란이 일었으나 결국 남성조에 여성연수생이 ‘끼어넣기’식으로 편성돼 여성연수생들은 고민을 공유하기조차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연수생들이 버티는 방법은 ‘동화 아니면 단절’ 두 가지 방식밖에 없다”며 “법 앞에 평등하다는 신념을 실천해야 하는 예비법조인들이 모인 연수원이었지만 여성은 여기서도 소수자로 분류돼 성평등을 논하기에는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토로했다.

ㄴ씨는 법대를 다니면서부터 익숙해진 남성문화에 동화되려고 애썼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그는 연수원에서 원치 않는 술자리라도 ‘차라리 즐기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는 폭탄주와 음담패설이 오고가는 술자리가 술을 못 마시는 여성연수생들에게는 곤욕이었을 거라며 스스로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죽이면서 남성 연수생들이 불편하지 않게 미리 재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는 최근 여성연수생들의 수가 늘면서 연수원의 문화를 바꿀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학과 소수자를 위한 인권과목이 필수로 연수원 내에서부터 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법연수원 30기로 현재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ㄱ씨는 “고시촌 일대에 유흥업소들이 성행하는 것은 암기위주의 공부 스트레스를 유흥으로 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사법연수원에서 실무연수를 받을 쯤이면 단란주점에서 회포를 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는 판·검사가 돼서도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그는 “여성법학회가 몇 년전에 생겼지만 보수적인 연수원의 분위기에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일 뿐 생활 속에서 체질화 된 성평등 의식은 아니다”며 “인권관련 특별강의가 있지만 이는 선택사항으로 연수생들은 점수를 잘 주는 과목을 듣기 마련이다”고 말했다.

사법연수생은 5급 상당의 별정직 공무원으로 수습기간은 2년이다. 학기 중에는 민사·형사·검찰과 변호사 실무를 포함한 법률이론 교육이 이뤄지며 교육기간 중 75시간 동안 법률구조공단, 시청 등 기관에 파견돼 법률상담 등 사회봉사 연수를 한다.

여성학, 정식과목 채택해야

여성학자들은 “법과대학과 사법연수원의 교과과정에 여성관련 법률과 여성학에 관한 강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며 “연수생들이 여성단체 실무자,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관련 현안과 관련있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 여성적인 관점에서 사안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개인의 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법학대학이나 사법연수원에 여성학이 정식과목으로 채택돼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는 부족함이 없다”며 “적어도 성평등에 대해 인식하고 법 집행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중인 ㄱ변호사는 “연수생들에게 도덕성, 윤리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라며 “이번 사건은 개인에 국한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선배의 입장에서 볼 때 연수생들의 전체적인 도덕성이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학이론과 법기능만을 암기하는 연수생들은 성적만 좋으면 법관이 될 수 있는 시스템에 물들어 있다”며 “법교육의 개혁 없이는 성평등한 법률서비스는 요원하다”고 강조했다.

법학 대학원생인 나모(29)씨는 “사법시험을 보려면 몇천개의 민법 판례를 외워야 하는데 대부분 결론만 외우면 된다”며 “여성관련 범죄는 다른 경우에 비해 판례가 많지 않고 암기 사항이라는 이유로 우선 순위에서 떨어져 깊이 공부하지 않게 된다”고 밝혔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ㅅ씨는 “법을 배우는 것과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며 “여성차별이 사회에 만연돼 있지만 차별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구제하는 절차를 익힐 뿐”이라고 말했다.

여성단체들은 판·검사들에게 남성중심의 편견을 깨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법의 보편성’에 의해 판단되고 있는 여성관련 범죄들은 피해자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건의 특수성이나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피해자의 진술이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성폭행 사건 등에 대해 여성의 시각에서 판단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변호사 ㅇ씨는 “연수생들의 수가 1000명에 육박하면서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것 같다”며 “여기에 진보적인 시각, 소수자의 보호에 치중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여성단체연합 남윤인순 사무총장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법원이 사회통념으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이미 법원의 판결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사법연수원에서부터 별다른 의식없이 이런 판례들을 암기한다면 보수적인 사법시스템이 악순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신아령 기자arshi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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