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범행동기·일면식 없는 범죄 사건
학술용어처럼 혼동되지만
여러 범죄 '편의상' 묶어 부른 것
'무차별 범죄' '이상동기범죄' 등으로도 불려

서울역 매표소 일대의 모습. 기사와 관련없는 사진. ⓒ뉴시스.여성신문
서울역 매표소 일대의 모습. 기사와 관련없는 사진. ⓒ뉴시스.여성신문

 

 

지난달 26일 발생한 ‘서울역 폭행사건’
언론보도에서 ‘묻지마 범죄’로 명명돼...
온라인을 중심으로 "여성혐오 범죄다" 주장
실제로 용의자는 남녀 모두에 시비

2일 서울역에서 일면식 없는 여성을 폭행해 광대뼈를 함몰시킨 30대 남성이 자택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이날 오후 10시30분경 조사를 마치고 나온 남성은 기자들의 질문에 “그냥 집에 가다가” “계획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처음 사건이 알려진 시점부터 언론은 일명 ‘서울역 폭행사건’을 ‘묻지마 범죄’ 라고 불렀다.

지난 31일 처음 ‘서울역 폭행사건’이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키고서 SNS에서는 ‘#서울역여성혐오범죄’라는 해시태그가 쏟아졌다. 트위터에서는 1일 오후까지 실시간 트랜드에 올라 4만여개에 달하는 글이 공유됐다. 사건을 ‘#여성혐오범죄’라고 주장한 한 트위터 이용자는 “만약 피해자가 키 180cm의 남자였다면 주먹으로 맞았겠느냐”며 “묻지마 범죄라는 말은 너무 많은 것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거 후 용의자인 30대 남성 A씨가 피해자 B씨를 폭행하기 전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중년 여성과 다른 남성에게도 욕설을 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한 것이 드러났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직후인 지난해 5월 20일, 서울 강남역 10번출구 앞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수많은 포스트잇을 바라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직후인 2016년 5월20일, 서울 강남역 10번출구 앞 추모공간을 찾은 시민들이 수많은 포스트잇을 바라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묻지마 범죄’ 용어 시민 중심으로 논란
‘혐오범죄’로 세분화 할 필요성 대두

학계에서는 이미 ‘묻지마 범죄’라는 용법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다. ‘묻지마 범죄’는 학술적 용어가 아니다. 범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범죄 동기와 일면식이 없을 때 이를 언론이 ‘묻지마 범죄’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대중이 처음 ‘묻지마 범죄’의 용법에 대해 문제를 인식한 것은 2016년 5월 서울 강남구 강남역에서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 때다. 범인 김성민(34)이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하고 김씨가 숨은 30여분간 화장실을 이용한 6명의 남성은 그냥 보낸 점 등을 토대로 시민들을 중심으로 ‘여성혐오 범죄’라는 주장이 나왔다.

전문가들도 경찰이 ‘묻지마 범죄’라고 밝히고 언론이 이를 그대로 쓰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와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블로그 등을 통해 ‘묻지마 범죄’라는 말은 일련의 혐오 범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인식을 막는다는 취지의 의견을 개진했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 ‘묻지마 살해는 없다’가 17일 서울 강남역 강남스퀘어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행진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3주기 추모제 ‘묻지마 살해는 없다’가 17일 서울 강남역 강남스퀘어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행진을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학술용어 아니어서 정의 변화 계속돼
"언론이 쓰고 시민이 논의하며 세분화"
유형에 따라 남성 피해자가 더 많기도

‘묻지마 범죄’라는 용례가 언론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은 2003년 2월경이다. 2003년 당시 몇 개 일간지를 중심으로 대구 지하철 전동차 방화사건 이후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범죄들에 대해 ‘묻지마 범죄’라는 명칭이 사용됐다. 당시 ‘묻지마 범죄’에 대한 정의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뚜렷한 동기 없이 화풀이 차원에서 저지르는 범죄다.

학계는 2010년 전후로 다른 학술 용어를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해왔지만 통일된 용어는 아직 없다. 점차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는 학계에서 사라져가는 추세지만 학자마다 ‘무동기 범죄’, ‘무차별 범죄’, ‘이상동기 범죄’ 등으로 다르게 부르고 있다.

‘묻지마 범죄’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통계를 통한 구체적 피해자상을 그리는 것은 어렵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학술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분석하는 방식에 따라 피해자 성별이나 연령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안상원 광운대학교 범죄연구소 연구원이 지난 1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 성별은 남성 44.4%, 여성 55.6%이며 피해자 연령은 전연령층에 고르게 분포된다. 그러나 ‘묻지마 범죄’의 동기를 세가지로 나누어 △화풀이에 의한 범죄 △이유 없는 범죄 △정신병에 의한 범죄 각각으로 살피면 피해자상이 다르다. ‘이유 없는 범죄’의 경우 ‘길거리’에서 ‘50대 남성’이 주로 피해자가 되며 대체로 상해로 그치지만, 나머지 두 유형에서는 ‘길거리’에서 ‘20대·60대’ ‘여성’이 주요한 피해자가 돼 죽음에까지 이른다. 

교정복지연구에 논문을 기고한 교육학자 유주영에 따르면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면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관점에서 해석이 오가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결론이 도출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경우 ‘여성혐오 범죄’와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로 시각이 갈렸으나 이를 통해 혐오범죄와 정신질환 범죄 각각에 대한 대응책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무선 한세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조교수는 “이른바 ‘묻지마 범죄’의 대부분 범행동기가 정신질환과 사회분노로 나뉘는 것에 따라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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