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천년의상상 펴냄

집안 청소를 하는 여성의 모습. 미취학 자녀를 키우는 전업주부는 하루 평균 8시간 이상 일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그저 ‘집안일’로만 여겨지고 있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의 모습. 전업주부는 하루 평균 8시간 이상 일하지만, 이들의 노동은 그저 ‘집안일’로만 여겨지고 있다. ⓒ여성신문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것은 철학자 하이데거다. 언어는 우리가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면 존재가 잘 못 된다.

“하루 종일 집에서 뭐 해” “놀면서 애보는 게 뭐가 힘들어” 전업주부라면 누구나 한 두 번은 들어봤을 일상의 언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언술 안에는 여성을 집 안의 존재로 가두는 뿌리 깊은 가부장적 사고방식 뿐 아니라, 집안일과 육아를 무임금의 ‘텅 빈’ 일로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관이 스며있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은 “젠더의 눈으로 본 자본주의”에 기초한 책이다. 저자는 여성학자도 아니고 경제학자도 아니다. 엄마로, 작가로, 강연자로 살아가면서 만난 수많은 여성들이 ‘주부’라는 이름으로 온갖 노동을 하면서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는 현실의 밑바닥을 뒤집어 보인다. 설거지, 빨래, 쓰레기 버리기(분류해서 버리는 일은 정말 노동이다) 같이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노동부터 아픈 가족 돌보기 같은, 당장 간병인을 쓰면 돈으로 환산되는 노동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수행하는 ‘집안 일’의 종류와 층위는 정말 다양하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과 집안 일에 대한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책들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책의 범주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부터 인생 모든 문제에 명쾌한 답을 던지는 문제적 스님 법륜 스님의 『엄마 수업』까지 종횡무진 오간다. 모두 15권의 책을 제시하는데, 이 책들을 통해 얻을 것은 하나다. 집안일은 중요한 일이며 여성에게 ‘무임금’으로 맡겨질 일이 아니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돌봄’의 사회적·경제적·심리적 가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천년의상상 펴냄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정아은 지음·천년의상상 펴냄

 

둘째를 임신하고 회사를 그만둔 저자는 “집에서 노는” 존재가 되었다. 그때 만난 전업주부 동료들은 사회에서 만난 여성들과 많이 달랐다. 약속이 흐렸고 가부장적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충고’가 만연했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의 발생을 톨스타인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을 통해 이해했다고 말한다. ‘전업’ 주부이지만, 그것이 과연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맺은 약속(계약)을 지켜내야 하는 자본주의 현대 사회로 진입하지 못 한 중세의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흔한 일들을 화두로 삼아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이 셋을 둔 남성과 자녀가 없는 기혼남성이 부양가족 세금공제와 국민연금의 미래 부담을 놓고 불꽃 튀는 싸움을 벌이는 것을 본 저자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 아이를 잘 키우면 사회에 도움이 될까, 가족 안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할까. 미국 매서추세츠대 경제학과 교수 낸시 풀브레는 저서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는 공공재라고 말한다. 이들의 계발된 능력과 자질로부터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가 제대로 돌봄과 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회에 해악을 초래한다. 그래서 사회는 부모의 노력을 인정하고 보상해야 하며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가 아이를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공재로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서 돌봄을 담당했던 여성에게 어떤 보상이 돌아가는지가 문제다. 같은 나이의 남녀가 있다. 남성은 비혼으로 직장에 몰두하여 돈을 많이 벌었고 퇴직 후 두둑한 연금을 받는다. 그러나 그가 받는 연금을 창출할 세 아이를 키워낸 전업 주부는 경제활동을 한 경력이 없으므로 연금도 없다. 돌봄의 경제학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다.

법륜스님의 『엄마수업』은 “아이의 모든 것은 엄마에게 달려있으므로 엄마는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도 가끔 법륜스님의 강연을 듣곤 했지만, 해탈한 듯한 스님의 가르침은 여성들을 이중삼중으로 옭아매는 성별분업과 가부장적 관념에 기초해있다. 저자는 법륜스님의 설법에 귀 기울이는 청중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 그 여성들이 원하는 답을 스님이 찾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볍지 않은 도서목록과 함께 풀어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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