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만금이는 거기에 없다

지난 7월 중순경, 내가 신문을 꼼꼼히 읽지 않아 지나쳐간 사이, 문제의 그 시가 한겨레신문에 실렸다. ‘만금이년 젖 먹자’는 이하석 시인의 시. 나는 뒤늦게 이 시를 읽고, 여전히 높고 견고한 그 벽에 다시 한번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너무 늦게 뒷북을 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빈곤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상상력에 일침을 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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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순 작 <어머니의 대지>.

“우리 만금이 늘 새롭다고 새만금이/헌 것 그대로가 새 것인 새만금이/그대로 늘 새로운 새만금이// 젖 먹어라//우리 찾아가는 삼보일배 길에/ 무릎 까져 흐르는 고통의 피가/온몸 흐르는 땀방울 방울 방울이/다 젖이다//이 길 막는 이들/새 것만 우기며 만금이 겁탈하고 죽이는 이/젖 못 얻어먹으리라//헌 것 그대로가 늘 새 것이 되는/만금아 천만금아 만만금아/우린 네가 낳은 딸이고 아들이거니/미륵이거니//만금이년 살려 젖 얻어먹자/ 많이 먹고 억만년을 또 드넓게 크자”

아이고 또 그건가. 지겹다. 지겨운 그 ‘강간’의 메타포. 전기톱날에 겁탈 당하는 원시림, 털북숭이 미군에게 능욕 당하는 여리디 여린 우리 처녀…. ‘Fucking USA’로 보여주듯이, 무력하고 유약한 희생자 여성의 이미지를 환기시켜 소정의 목적을 이루려는 남성적 기획들.

새만금을 살리자는 기획의도로 쓰인 이 시에서도 여전히 자연으로 동일화된 여성의 몸을, 혹은 여성으로 동일화된 자연을 남성의 소유, 지배, 권력의 상징적 저장소로 바라보는 가부장제의 느끼하고 거북스런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인은, 아무래도 ‘새만금을 살려야한다’는 순수한 동기로 자기 나름의 가장 효과적인 메타포를 동원했다고 할 터이지만, 이 시는 조단조단 따져 들어가지 않아도 그냥 기분이 나빠지는 시이다. 대체 자길 낳아준 어미에게 이 년 저년 막말하는 놈에게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까? 도대체 그가 원하는 것은 ‘은혜로운 어머니의 젖’인가, 만금이년의 풍만한 젖가슴인가.

자연과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

‘만금이년’ 운운한 것이 설사 자연에 대한 친근감을 나타내주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대실패이다. 여성에 대해서라면 필요할 때 칭송하다가도 수 틀리면 멸시하고 비하하는 그 못된 버릇들, 자식과 남편 위해 새벽밥 지어주고 오지 않는 남자들을 위해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여놓는 ‘돌아가고 싶은 품 속’의 어머니와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그 ‘구원의 여성상’을 희구하고 미화하면서도, 한편으로 룸살롱에 가서 이 년과 저 년의 젖가슴을 맘대로 주무르고자 하는 남성들의 착취적 판타지, 지치고 피곤할 때면 언제든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즐길 수 있는 자연, 언제나 위로와 충전이 필요하면 원시 대자연으로 존재해 주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마음대로 약탈하고 조롱하고 파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같은 방식의 남성 판타지들…. 나는 새만금을 지켜내자고 쓴 시에서 역설적으로 그런 남성중심 사회의 자가당착적 판타지를 보고 허탈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그렇게 언제나 순순히 젖을 내어 주는 당신들의 만금이는 거기에 없다. 만경과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로 만들고자 두 머리글자를 딴 ‘새만금’은 사실 그 이름 자체가 ‘이윤’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는 남성 중심적 개발 논리가 붙여놓은 것이다. 아메리카가 결코 식민주의 탐험가가 붙인 이름과 관계없이 오랜 세월 삶을 일구어 놓았던 원주민의 역사와 사연이 살아있던 삶의 터전이었듯이, 새만금은 그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 오랫동안 여성들이 칼날 같은 갯바람 맞아가며 몸을 숙여 조개를 캐어 먹고살던 생명의 ‘뻘밭’이었다.

그 지역 남성 활동가가 고백하듯 ‘반거들충이’ 남편들이 식구들을 내몰라라 할 때, 고된 노동으로 자식을 먹이고 키워온 이 지역 여성들의 삶터이자 쉼터이고, 또 놀이터인 ‘뻘땅’이었던 것이다. 그 뻘땅 위에서 물때를 알고, 조개들이 생겨나고 자라는 것에 밝으며 조수와 바람으로 갯벌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감지하는 여성들의 생태적 지식과 지혜들이 풍성하게 자라왔다.

개발의 논리를 들이미는 자들에겐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거무죽죽한 땅으로 보이고, 갯벌을 지켜내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남성중심적 메타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겐 약하고 무력하며 한없이 순종적인 여성의 몸으로 보일지 몰라도, ‘뻘밭’은 여성들이 고단한 노동으로 삶을 일구어내어 왔던 생존의 땅이며, 생명의 땅이다. 그래서 ‘뻘땅’은 그저 겁탈 당하다 무조건 수용하고 내어주는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고 다른 생명들까지 양육해온 ‘강인하고 질긴’ 생명의 터전이다. 시화호의 그 비참한 조개더미를 바라보며 자기 몸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으로 눈물을 흘렸던 새만금 뻘땅 아주머니들의 분노와 저항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그 아주머니들의 허리 숙인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젖을 얻어먹고 싶으면, 어미를 사랑하고 존중하라. 그 고된 살림의 노동에 경의를 표하고 감사하라. 무례하고 오만한 당신들에게 젖을 내어줄 만금이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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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숙 / 에코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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